경술국치, 한일합방, 한일강제병합….
100년 전 한국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식민지가 된 일을 표현하는 말이 여러 가지가 있다. 학교 다닐 때 배운 것은'한일합방'이었는데, 요즘은 '한일강제병합'이란 말이 많이 쓰인다.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
딸아이가 배우는 중학교 국사 교과서를 살펴보니 "이른바 합방 조약을 체결하였다"고 돼있다. 과거와 달리 합방이란 말 앞에'이른바'란 수식어가 들어가 있다. 해방 후부터 교과서에는 줄곧'합방'이라고 기술해왔다. 합방(合邦)이란 '둘 이상의 나라가 하나로 합침. 또는 그렇게 만듦'이라고 국어사전에 나와 있다. 강제와 폭력이 아니라 자의와 합의에 의해 이루어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자의가 아니라, 강제와 폭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한국인이면 누구나 알고 있다. 합방이란 말은 일본 메이지(明治)시대의 정한론자(征韓論者)들이 한국을 집어삼키겠다는 야욕을 숨긴 채 "한국과 일본이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하여 하나의 나라를 세우자 "고 '합방운동'을 하면서 쓰기 시작했다. 국권을 넘겨주는데 동조한 친일파들도, 국권을 빼앗은 일제도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을 미화하는 의미가 포함된 이 말을 썼다. 일제강점기에 귀에 익숙해져 경술년에 당한 나라의 수치라는 뜻으로 널리 쓰였던 경술국치(庚戌國恥) 대신 해방 후에도 한일합방이란 말을 무심코 썼던 것이다.
교과서에서 합방 앞에 '이른바'란 수식어를 넣은 것은 이 같은 내력을 아는 저자들이 "일본이 말하는"이라는 뜻으로 쓴 것 같다. 결국 합방이란 말은 한국인이 쓰기에는 부적절한 용어인 것이다.
최근 학계와 언론에서 널리 쓰고 있는 '한일강제병합'이란 말도 사정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경술국치 100년을 앞두고 여러 학술ㆍ문화행사를 준비하게 됐는데 관련 학계에서는 어떤 용어를 사용해야 할 지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 간에 체결된 조약문에 병합이라고 표현돼 있으므로 병합이란 용어를 쓰되, 불법ㆍ부당성을 강조하기 위해'강제'란 말을 집어 넣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병합(倂合)이란 말 역시 일본인이 만든 것이다. 한국 병탄의 설계도인 '대한기본방침'을 작성한 일본 외교부의 한 관리가 합방이란 말이 적절치 않다고 보고 이 단어를 새로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한제국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폐멸되고 일본의 일부가 되었다는 의미를 담되 침략이라는 점을 감추기 위해 당시 널리 쓰이던 합병(合倂)이란 말을 뒤집어 만든 것이었다. 일본은 공식적으로는 병합이란 말을 사용했고, 지금도 그렇게 쓰고 있다. 결국 우리 학계도 병합이란 표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강제'란 말을 삽입해 그냥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강제적이고 강압적으로 일어난 일이기에 병탄(倂呑)으로 써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것 같은데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다.
경술국치와 함께 큰 비극이었던 6ㆍ25전쟁을 놓고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과거에는 '6ㆍ25사변''6ㆍ25동란'이라고 했었는데 1980년대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일컫는 '한국전쟁'이라는 표현이 일반화됐다. 우리 땅에서 벌어진 일을 남의 일인 양 표현하는 이 말을 써야 유식한 것처럼 여겨졌다. 몇 해전 6ㆍ25전쟁으로 바꿔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어 지금은 교과서에서도 '6ㆍ25전쟁'으로 쓰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내에서도 강한 경제력을 자랑할 수 있게 됐음에도 역사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힘이 아직 이 정도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웬일일까.
남경욱 문화부차장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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