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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희망] <9> 광화문 복원 석공 임동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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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희망] <9> 광화문 복원 석공 임동조씨

입력
2010.08.19 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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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이 4년 여의 작업 끝에 복원됐다. 일제침탈과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일그러진 제 얼굴을 찾은 것이다. 광화문 복원에는 석조, 목조, 단청 등 여러 분야의 장인들이 참여했다. 임동조(55)씨는 그 가운데 석조 분야를 책임지는 도석수(都石手)다. 그가 복원한 문화재는 광화문 만이 아니다. 서울시내 궁궐의 복원 문화재에는 대부분 그의 손길이 닿아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문화재 전담 외과의’라고도 하고 ‘문화재 보수ㆍ복원의 산증인’이라고도 한다. 2007년에는 노동부가 그를 석공예 명장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옛 분위기 살리기 위해 노력

광화문 복원을 끝낸 뒤 그는 이틀간 강원도에 내려가 휴식을 취했다. 함께 일한 석공들도 대부분 얼마간 일손을 놓았다. 공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오전 7시부터 하루 11시간 이상 정신 없이 일을 했던 만큼 잠시나마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서울로 다시 돌아온 그가 완공된 광화문을 보며 슬며시 웃는다. “천운이었지요, 이 일을 맡은 게. 시작할 때는 두렵기도 했지만 결과가 좋아 기분 좋습니다.”

무거운 돌을 다루는 일이다 보니 사고가 나고 사람이 다치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그런 것 하나 없었다. 그러니 그의 말마따나 아쉬운 것 하나 없는 공사였다.

광화문은 1395년 태조 대에 처음 건설돼 1865년 고종 대에 중건됐다. 그러나 일제 때는 경복궁 동쪽 건춘문 부근으로 옮겨졌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폭격을 받아 목조건물이 소실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8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복원했지만 목조 대신 콘크리트를 사용했고 방위도 틀어졌다. 이번 복원은 잘못된 방위를 바로 잡고 문루를 목조로 바꾸며 석조도 정비하는 것이다.

이번 공사에서 임동조씨가 맡은 것은 문루 아래 석조 부분인데 그는 1865년 중건 당시의 분위기를 되살리는데 주력했다. 광화문에는 창건과 중건 당시의 석재가 섞여 있는데 이번에 복원하면서 새로운 석재를 사용하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그래서 광화문을 해체하고 기존 석재를 바닥에 깔아 일일이 상태를 점검, 재사용 가능성을 살폈다. 옛 석재 중 풍화작용 등으로 표면이 훼손되고 파손돼 제 규격에서 벗어난 것이 적지 않았다. 1968년 복원할 때도 그런 것이 있었겠지만 그때는 콘크리트를 사용했기 때문에 웬만큼 것은 그냥 붙여서 썼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쓸 수 없는 석재는 빼고 새 석재를 쓰되 옛 것과 비슷한 질감을 주기 위해 정으로 표면을 쪼고 부드럽게 다듬었다. 색상까지 옛 분위기를 살리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할 재주는 없었다. 임동조씨는 “공사 도중 옛 석재를 보며 옛날의 석공은 어떤 공구를 썼고 어떤 기법을 사용했는지가 궁금했다”고 말했다.

석재끼리 맞닿아 파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좌우로 3㎜ 정도의 간격을 두고 위아래로 쌓을 때 충격 완화를 위한 철편을 끼운 것도 전통방식을 따른 것이다.

이번에 사용한 석재는 경기 포천에서 채석한 화강석이다. 조선시대에는 인왕산, 북한산 등 경복궁과 가까운 곳에서 나온 돌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1968년 복원 때는 지금의 노원구 중계동에서 가져왔다는 증언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인왕산이나 북한산 등에서 채석허가가 나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포천 돌을 썼다. 석재는 무게가 엄청나다. 아래쪽 선단석은 하나에 10톤에 이르며 웬만한 것은 1톤이 넘는다.

공사 도중 석공들을 괴롭혔던 일 가운데 하나가 홍예석의 아귀가 맞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쌓아도 딱 들어맞지 않아 제사를 지냈더니 원하는 대로 됐다. 임동조씨는 “600년 이상 된 경복궁은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사건도 많았고 그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이 피를 흘렸는데 우리가 올린 제사에 감동을 받아 고인들이 도와준 것 같다”며 웃었다.

자형과 형의 손에 이끌려 시작한 석공 인생

임동조씨가 복원한 문화재는 한 둘이 아니다. 경복궁 건천궁,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창경궁 옥천교, 덕수궁 중화전 박석, 경희궁 자정전 등 서울시내 5대 궁궐의 복원 작업에 모두 참여했다.

석조 문화재 복원은 망치와 정을 주로 사용해 깨고 쪼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그의 손에는 늘 굳은 살이 박혀 있다. 돌을 새기고 맞추는 작업은 생각보다 정밀한 것이어서 매우 꼼꼼해야 한다. 그런 일을 40년 이상 하면서 그는 만성 위장병과 목 디스크를 얻었다.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할 수 있다. 줄이 끊어져 돌이라도 떨어지면 사고가 나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늘 큰소리를 지른다. 오른쪽 검지 손가락 마디도 하나 없다. 작업 도중 다친 것인데 일 때문에 필요한 만큼의 치료를 받지 못해 그렇게 된 것이다.

광화문 복원에는 임동조씨의 40년 석공 인생이 녹아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을 쉬다가 1969년 석공 일을 시작했다. 집안 형편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한 그를 경복궁 민속박물관 신축 공사장으로 인도한 사람은 자형 최석휴(72)씨와 형 양동일(62)씨다. 그때는 석공이 제법 돈을 벌던 시기였다. 이왕이면 어려서 배워야 솜씨가 좋아진다는 말이 있어서인지 그가 도시락을 들고 처음 일하러 갔을 때 또래의 아이들이 30~40명이나 있었다. 열 네 살의 그가 처음 한 일은 석공들이 마실 물을 떠다 주고 연장을 챙기고 풀무질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일을 했더니 연장의 이름을 알게 됐고 망치질도 슬슬 시작할 수 있었다. 열심히 망치질하는 그를 보고 당시 현장을 지휘하던 안기호씨가 “그 놈 망치질 참 잘한다”라고 칭찬해 주었다. 2004년 작고한 안기호씨는 1968년 광화문 복원을 주도하고 이듬해 민속박물관 신축을 지휘했다. 임동조씨는 이번에 스승이 복원한 광화문을 해체해 복원했기 때문에 감회가 남다르다.

안기호씨는 임동조씨의 스승의 스승의 스승이다. 안기호-최석휴-임동일-임동조로 계보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임동조씨는 아들 경묵(29)씨도 끌어들였다. 건축을 전공한 아들에게, 요즘 취업이 어려우니 아예 아버지 밑으로 들어오라고 잡아 끌었다. “녀석이 처음에는 별 재미를 못 붙이더니 요즘은 일도 열심히 하고 실력도 늘었습니다. 얼마나 잘할지 지켜봐야지요.” 아들은 이번 광화문 복원에도 참여해 아버지 심부름도 하고 돌도 다듬었다.

문화재 복원 석공도 수입해야 할까

석공의 세계는 유난하다. 여러 사람이 “어기여차” 소리 내며 큰 돌덩어리를 옮기다 보니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칠 수 밖에 없다. 땀을 같이 흘리니 협동이 잘 된다. 현장에서 점심 먹을 때는 꼭 도시락을 나눠먹는다. 집안 경조사에도 빠지지 않고 작업 도중 다치기라도 하면 반드시 문병을 갔다. 옛날에는 친목계도 자주 만들었다.

그런 석공이 되려면 3년 정도 스승으로부터 일을 배워야 한다. 이 기간에는 보수도 받지 못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스승이 연장 한 벌을 만들어 준다. 독립해서 이 연장 갖고 혼자 돈벌이 하라는 뜻이다. 수련 기간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면 스승이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제자에 대한 애정과, 제자를 더 부려먹어야(?) 하겠다는 현실적 이익이 섞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옛날 같지 않다. 일이 힘들다 보니 석공이 되겠다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 전국적으로 문화재 복원을 할 수 있는 석공은 300여명 정도다. 이 중 70~80명은 고령이어서 실제 일을 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이번 광화문 복원에는 매일 20여명 정도가 투입됐는데 일흔 가까운 고령자도 있었다. 석공은 힘을 많이 써야 하는데 고령은 아무래도 어려움이 있다.

임동조씨도 경묵씨를 포함, 모두 3명을 제자로 두었는데 아들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을 배출한 것이 15년 전이며 그 이후로는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가 볼 때 그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서울 가까이에 석공 일을 배울 곳이 없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적어도 2시간은 가야지 일을 배울 수 있는데 그것이 석공의 배출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석물공장은 아무래도 먼지와 소음이 많이 나기 때문에 수도권에서는 허가가 잘 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석조 문화재 복원이 걱정된다. 실력 있는 석공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현실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이러다간 문화재 복원도 외국인 수입해서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가 볼 때 석공은 할만한 직업이다. 먼지 마시고 힘이 들지만 노력하고 열심히 하면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 특히 문화재를 복원하는 것은 의미도 크고 재미도 있다. 그는 숭례문이 불 탄 뒤 국민이 보여준 반응에서 문화재에 대한 기대와 관심을 읽을 수 있었다.

임동조씨가 문화재를 복원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옛 장인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옛 돌에 새겨진 선인들의 흔적을 보면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돌을 다듬었는지 어느 정도 보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복원할 때는 더욱 겸손하고 신중해져야 한다고 다짐하지요.”

임동조씨가 문화재를 복원할 때 매일 새벽 목욕재계하고 경건해지는 이유는 바로 이 작업을 통해 조상들과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박광희 편집위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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