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2월 그는 대입학력고사를 치르다 시험장을 박차고 나왔다. “어차피 떨어질 거 취업이나 빨리 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날 신문 구인란을 보는데 유일하게 고졸도 응시 가능했던 것이 극단 현대극장 오디션이었다.
연기는커녕 연극을 본 적도 없었던 그는 며칠 뒤 오디션에 응했다. 추워서 청바지 안에 추리닝을 입고 있던 그는 심사위원들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바지를 벗었다. 웃음이 쏟아졌다. 그 덕분일까. 100명 가량 응시한 오디션에서 그는 합격자 4명에 들었다. 250만명이 본 영화 ‘아저씨’에서 천하에 몹쓸 악당 만석을 연기하며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는 김희원(39)의 연기 인생은 그렇게 운명처럼 시작됐다.
2007년 윤제균 감독의 ‘일번가의 기적’에서 깡패 역을 맡아 스크린 신고식을 치른 김희원이 ‘스카우트’ ‘거북이 달린다’ ‘육혈포강도단’ 등을 거쳐 ‘아저씨’로 영화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있다. 무뚝뚝한 표정에 불만스레 튀어나오는 대사가 웃음을 자아내는 그의 연기엔 오랜 시간 무대에서 다져진 내공이 묻어난다.
대학대신 극단에 들어가 오른 첫 무대는 89년 3월 사극 뮤지컬 ‘화랑 원술’. 당나라 병사로 너 댓 번 죽는 연기만 하다 막이 내렸다. “춤은 체조하듯 하면 되고 노래는 가요처럼 부르면 되겠지”라며 무작정 덤빈 연기였으나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렇게 대학로에 붙어 살다 보니 “내가 정말 제대로 하고는 있나”하는 의문이 들었고, 97년 서울예대 연극학과에 진학해 박건형, 이천희, 송창의 등과 동문수학하며 꿈에도 생각지 않은 대학 물을 먹었다.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한없이 재미 있는” 연극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버텼는지 모를 정도”로 가난한 시절이었다. “17년 연극 생활 중 1년에 한 푼도 못 번 해가 10년”이었다. 배가 고팠다. 현대극장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친동생 같은” 임창정이 어느 날 “형 나랑 같이 영화 하면 내가 밀어줄게”라고 말했다. 새로운 연기 인생의 출발이었다.
충무로 데뷔 3년 만에 기회가 왔다. 이정범 감독이 “잘 해 봅시다”며 ‘아저씨’ 출연을 제의했다. 그는 “태연한 척 했지만 ‘올 것이 왔구나’ 하며 속으로 너무 좋아했다. 꼭 하고 싶었던, 마음에 드는 큰 역할이었다”고 말했다. “비열하고 치사한 아주 나쁜 인물이라 너무 한심하게 비쳐지면 안 된다 생각했는데 정작 관객들은 웃더라. 연극할 때도 아무리 진지하게 연기해도 이상하게 관객들이 웃는 경우가 많았다.”
배우를 하기엔 그리 곱상한 외모는 아닌데 정작 그는 “얼굴이 경쟁력”이라고 했다. “출중하지 않은 얼굴이라 어떤 옷만 입히면 거기에 딱 맞는 평범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즘 어디를 가면 사람들이 뚫어져라 바라본다. 조금씩 얼굴이 알려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앞으로 구수하면서도 불쌍한 역할을 해보고 싶다. 꿈도 희망도 없어 보이는 요즘 사람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주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원유헌기자 youhone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