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층별 소비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부유층의 소비가 크게 느는 반면 서민층의 씀씀이는 점점 위축되는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 들어 부유층은 물론 일부 젊은층까지 명품 사재기에 대거 가세하면서 그 골이 한층 깊어지고 있다. 외국산 5,000만원짜리 TV, 3,000만원대 오디오 스피커는 없어서 못 팔 지경이고, 6,000만원짜리 최고급 샤넬 핸드백, 150만원대 루이비통 구두 등 이른바 명품 매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고 있다. 이에 반해 기업형 슈퍼마켓(SSM)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고 있는 재래시장은 온 종일 마수걸이(처음 물건을 파는 일)도 못해 생계 걱정을 하는 상인들이 부지기수이다. '빈익빈 부익부'를 심화시켜 공정한 사회 구현을 가로 막는 양극화의 두 얼굴인 명품시장과 재래시장을 차례로 둘러봤다.
■ 명품시장
선택받은 명품 시장, '불황은 없다'
덴마크의 최고급 가전 브랜드인 '뱅앤올룹슨' 서울 청담동 지점장 박재범(41)씨는 요즘 본사에 주문된 물량의 국내 도착 날짜를 확인하느라 국제전화를 거는 일이 부쩍 늘었다. 2,900만~5,300만원대의 고가 TV를 주문한 많은 고객들이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제품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3,000만원대의 오디오 전용 스피커를 비롯해 100만원에 달하는 MP3와 20만원 후반대의 이어폰 구입을 원하는 고객도 최소한 2주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 박 지점장은 "올해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벌써 120% 이상 늘었다"며 "국내 수요를 본사에서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명품시장은 한여름 폭염만큼이나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대·중소 가전에서부터 값 비싼 수입 자동차는 물론이고 최고급 가방과 의류에 이르기까지 각 백화점 내 고급 브랜드 코너나 명품 매장은 최고의 성수기를 맞고 있다.
대표 프리미엄 제품인 국내 수입 자동차 시장은 이미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전 라인업에서 10%가량 가격 인하를 단행한 벤츠의 경우, 국내에서 수혜를 톡톡히 얻고 있다. 고가 모델로 현재 1억4,100만~2억6,000만원대에 판매 중인 벤츠 S클래스의 올 상반기 판매량은 85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50% 이상 증가했다. 한성자동차 경기 서현 지점에서 근무하는 홍성우(34) 대리는 "올 들어서는 2대의 벤츠 차량을 한꺼번에 구매하는 고객들도 종종 눈에 띈다"며 "현재 주말 매장 오픈 시간을 1시간 더 늘려, 오후 9시까지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고 전했다. BMW나 아우디 등 고가 브랜드 매장에도 고객들이 붐비기는 마찬가지. 수입차 협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1억~2억원대 수입차 판매는 모델별로 각 업체당 적게는 10%에서 많게는 50% 이상까지 증가했다.
여성용 명품시장도 사상 최고 매출
여성용 명품 시장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초고가로 잘 알려진 서울 명동의 루이비통 매장은 복잡한 출근길 지하철을 방불케 한다. 10년 경력의 최소영(32) 시니어(과장급)는 "요즘에는 방문객들을 일일이 응대하느라, 교대로 먹는 점심도 제 때 못 챙겨 먹고 있다"며 "평일에는 하루 평균 3,500명, 주말에는 약 7,000명 정도가 매장을 다녀가고, 최근엔 외국인 보다 국내 소비자들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분위기를 설명했다.
루이비통의 국내 매출(면세점 제외)은 2008년에 2,800억원을, 2009년은 3,700억으로 증가했으며 올해는 전년대비 10% 이상 늘어난 4,000억원대를 바라보고 있다.
지난달 1일 서울 반포동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 문을 연 명품 패션 브랜드인 샤넬은 입점 첫날 단일 브랜드로는 사상 최대인 4억6,000만원 상당의 매출을 기록했다. 특히 샤넬 핸드백의 경우 10~20%씩 가격을 올린 직후였지만, 제품은 불티나게 팔렸다.
국내 소비자들의 남다른 명품 사랑은 유명하다. 최근 미국의 다국적 컨설팅 업체인 매킨지가 세계 주요국을 대상으로 명품 소비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지난해 명품 구입에 지출한 비용이 전년 보다 많았다는 응답자 비율은 한국이 46%로, 중국(44%)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반면 명품 구입 시 죄책감을 느끼거나 돈을 낭비한다고 생각하는 한국인 응답자는 22%에 불과해, 일본(45%)과 중국(38%) 보다 현저히 낮았다.
하지만 이같은 명품 열풍이 건강하고 합리적 소비 문화를 저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밥은 굶어도 가방과 신발 등은 명품을 사야 된다는 인식이 기존의 부유층과 일부 혜택 받은 젊은층은 물론이고, 최근 들어서는 소득 수준이 낮은 젊은층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며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물질 만능주의의 부작용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허재경기자 ricky@hk.co.kr
김주영기자
■ 재래시장
"오늘 하루 종일 5,000원짜리 바지 3개 팔았어. 바지 하나 팔면 나한테 떨어지는 게 1,000원이니까, 오늘 3,000원 벌었네. 휴우~. 점심 밥값(4,500원)도 못 벌었어. 장사는 무슨 얼어 죽을."
불만으로 가득 찼다. 서울 동대문 제기동의 경동시장에서 30년째 옷 가게를 하고 있는 배봉순(70) 할머니에게 요즘 가게는 말 그대로 애물단지다. 그나마 오늘은 해질 무렵까지 3개나 팔았으니 다행이라는 배 할머니는 "그냥 밥만 축 내고 가는 날도 많다"고 말했다.
재래 시장이 흉물로 변해가고 있다.
하루 종일 단 한 개의 물건을 팔지 못하는 상점은 넘쳐나고, 아예 가게 문을 닫은 곳도 허다하다.
한 때 명물 시장으로 불리며 호황을 누렸던 옛 명성은 온데 간데 없다. 경기가 좋지 않은데다, 곳곳에 들어선 대형마트와 백화점의 위상에 눌린 탓이다.
대형마트로 손님 몰려, 이웃들끼리 사이도 벌어져… SSM은 암적인 존재
"10원짜리 하나라도 더 벌어 보겠다고 밤 10시가 넘을 때까지 문을 열고 있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대형 마켓에서도 그 시간까지 영업을 하고 있으니, 우리 같은 구멍가게에 손님이 올 리가 없죠. 그 나마 알고 지냈던 동네 사람들도 하나 둘씩, 마트로 몰려갑니다. 덕분에(?) 수 년째 알고 지낸 동네 이웃들하고 사이까지 안 좋아지는 것 같아요."
서울시 황학동에 있는 중앙시장에서 15년째 슈퍼마켓을 운영 중인 윤미정(51·여)씨는 인심마저 사나워지고 있는 것 같다며 동네 분위기를 전했다.
여기에 최근 골목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고 있는 SSM은 그야말로 재래시장에게는 '암적' 존재다. 19일 대형 H마트가 들어설 예정인 서울 강서구 화곡본동에서 14일부터 무기한 단식 삭발 농성에 들어간 이윤근(61) 서울남서부수퍼마켓협동조합 이사장은 "강서구 내에서만 올 연말까지 7~8개의 대형 마트가 문을 열려고 준비 중"이라며 "한 여름 땡볕에 타 들어가는 영세 상인들의 절박한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정부나 국회에서 이렇게까지 SSM 문제를 손 놓고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농성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하루씩 벌어 먹고 살아가야 하는 열악한 상황 탓에, 함께 동참할 수도 없는 게 열악한 소상인들의 현실이다.
영세 도매상도 직격탄… 자영업자 수 해마다 급감
영세 도매시장도 예외 없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서울 창신동 동문시장에서 신발가게를 하고 있는 김우성(40) 사장은 "거래가 미뤄지는 게 아니라 최근에는 거래처 자체가 아예 없어지면서 잠재 매출도 기대하기가 어려지고 있다"며 "1~2년 전만해도 100만원 어치 신발을 사가지고 갔던 사람들인 지금은 10만원 어치 밖에 안 사간다"고 말했다.
이 같은 상황을 반영이라도 하듯, 국내 자영업자 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2월 600만명 선이 붕괴된 이후, 지속적인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국내 자영업자 수는 2009년7월 583만4,000명에서 올해 7월에는 570만6,000명으로, 1년 만에 13만명 이상의 소상공인이 더 사라졌다. 소상공인들에 대한 정부의 일부 지원 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체감온도는 지극히 낮은 편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좋은 여건을 갖춘 대기업의 대형마트에서 영세상인들과의 상생 노력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노화봉 소상공인진흥원 조사연구팀장 "간판 교체와 매장 진열을 지원하는 정부 주도의 '나들가게' 사업 등이 영세 상인들을 대상으로 진행되고는 있지만 근본적인 재래시장 문제 해결에는 버거운 게 사실"이라며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마트 등에서 먼저 영세 상인들을 고려해 취급 품목이나 운영시간 조정 고려 등의 노력을 병행해야만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허재경기자 ricky@hk.co.kr
김윤정 인턴기자 nurme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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