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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48> 이만부(李萬敷)의 실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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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48> 이만부(李萬敷)의 실학사상

입력
2010.08.1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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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부는 숙종대 청남의 핵심인 좌참찬 이관징(李觀徵)의 손자요, 남인의 맹장인 예조참판 이옥(李沃)의 아들이다. 연안이씨 명문 출신이다. 숙종대는 서남당쟁이 심해 아버지 이옥은 1678년(숙종 4) 선천(宣川)으로부터 시작해 12년간 정주(定州)·가산(嘉山)·안령(安寧)·회령(會寧)·갑산(甲山)·곡성(谷城) 등을 전전하며 유배생활을 하다가 1689년(숙종 15)에 겨우 방면되었다. 이를 본 이만부는 7-8세에 이르러 “정주(程朱)의 학문을 배워 도학을 밝히겠다”고 하고 벼슬길을 포기했다. 이에 할아버지 이관징은 가지고 있던 내사본(內賜本) 성리학책들을 모두 이만부에게 주었다. 그리고 25세 때에 아버지에게 과거(科擧)를 포기하고 공부만 할 것을 허락받았다.

그리하여 서호(西湖: 현 서강) 족한정(足閒亭)에서 유학 연구에 전렴했다. 그는 외고조부인 지봉(芝峰) 이수광(李晬光)의 실학사상을 이어받고, 윤휴·허목 등 청남학자들의 수사학(洙泗學)을 이어받아 실학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리고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형인 이잠(李潛)·이서(李漵) 등 기호남인계 학자들과 교류했다. 그는 특히 이익에게 자기의 학문을 이어받을 것을 부탁하고 죽은 뒤에 자기의 행장을 그에게 지어달라고 했다.

이만부는 34세 되던 1697년(숙종 23) 늦가을에 선대의 연고지인 상주 노곡(魯谷)으로 내려가 은거했다. 상주는 퇴계학파와 남명학파가 교차하는 지역이었다. 그의 후취부인은 퇴계학파의 종장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증손녀였다. 그러니 이만부는 퇴계학파의 기호계에 속하는 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학문에 있어서는 당파와 학통을 초월했다. 그는 천도유경설(天道有敬說)을 지어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의 인정을 받았으나 퇴계설과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학통의 배격을 받았다. 45세(1698) 에는 조선의 에 해당하는 ‘도동편’(道東編) 을 지어 율곡학설을 넣었다는 이유로 동료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리하여 47세(1710)에는 문경의 화음산(華陰山) 청화동(靑華洞)에 숨어 살았다. 그곳에서 그는 자기 학설을 총 정리한 (志書) 15권을 지었다.

그러나 이만부는 58세 되던 1721년(경종 1)부터는 금릉(金陵) 섬봉(蟾峰)으로 옮겨 소신껏 살기로 결심한다. 그해 10월 그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모신 서원인 덕천서원(德川書院)의 원장을 5년간 맡았다. 남명의 실천철학에 공감해서이다. 그리고 탕평론자인 경상감사 조현명(趙顯命)을 도와 낙육재(樂育齋)의 절목을 만들고 상주향교의 도훈장(導訓長)을 맡는 등 흥학에 앞장섰다. 그의 실천실학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만부는 18세기 남인 실학자로서 당파와 학통을 초월해 실천실학을 일으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미진하다. 앞으로 정치한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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