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잠에서 깨어나는 덕수궁
안창모ㆍ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
덕수궁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고종 황제가 강제로 황위에서 물러난 후 경운궁이 선왕의 거처로 사용되며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19년 고종 황제가 돌아가신 후 덕수궁은 깊은 잠에 빠졌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면서 대한제국의 황족 관련 업무를 관장하던 이왕직이 석조전과 중화전 그리고 함녕전 일원을 제외한 궁역을 매각하고, 나머지를 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많은 전각을 철거하면서, 황궁의 위상은 사라지고 말았다.
덕수궁은 그렇게 잊혀졌다. 공간은 변함없이 우리 곁에 있었고, 산술적으로 이용빈도는 높아졌지만, 그것은 고종 황제의 근대국가 건설 의지가 담긴 덕수궁이 아니었다. 덕수궁에 담긴 역사적 의미는 소멸된 채 유흥 대상으로서의 덕수궁만 남았다. 덕수궁의 소멸에는 식민정책이 개입되어 있었다. 궁역이 잘려나가고, 전각이 철거된 덕수궁에는 일제에 의해 새로운 기억이 새겨졌다. 덕수궁은 무능한 왕의 거처라는 식민사관이 자리잡았던 것이다.
광무개혁을 통해 근대국가 건설이 주도됐고, 고종 황제의 서거가 3ㆍ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제국의 심장부에서는 역사가 지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망국의 한이 서린 곳 또는 역사적 의미가 소거된 채 도심공원으로 인식되었고, 우리는 그 역사를 배웠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덕수궁의 역사는 일제가 심어놓은 거짓 역사였다는 사실은 최근에 개봉된 영화 ‘인셉션’을 떠올리게 한다. 역사의식 부재가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가져올지 아무도 인식 못하는 사이에 우리 모두는 일제가 심어놓은 것이 사실인 양 믿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지난 10여년 사이에 한국 근대사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 고종 황제는 서양식 근대국가를 지향하며, 경운궁을 중건하여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삼았으며, 환구단을 통해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전을 통해서는 대한제국이 당당한 근대국가임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하였다. 나아가 가로를 정비하여 세계적 화두였던 도시의 위생문제를 해결하고, 태평로와 소공로를 새로 개설하여 서울의 도시구조를 경운궁 중심으로 재편하였다.
이로써 광화문과 육조거리가 조선의 상징이었다면, 경운궁과 대한문 앞은 근대한국의 상징이자 원 공간이었고, 2002년 월드컵 이후에는 우리 모두의 뜻을 모으는 장소가 되었다. 구본신참(舊本新參)을 근간으로 제국의 틀 안에 민국을 지향했던 고종 황제의 뜻과 일치한다고 하겠다.
오늘에 이르러 이 시기에 대한 큰 그림이 선명해지면서, 덕수궁과 대한문의 가치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고, 지난 100여년 동안 왜곡되었던 우리 근대사가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던 덕수궁과 함께 당당하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제 덕수궁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담아낼지는 온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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