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이 칼럼에서 는 제목으로 이명박 정부 후반기 국정운영의 키워드는 공정성과 현장성이 돼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대통령이 진정 친서민ㆍ상생을 생각한다면,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회경제적 공정성 장치와 제도를 먼저 마련해야 하고, 그 내용은 관료들의 책상머리가 아니라 정책소비자의 구체적 삶에서 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공정성 강화가 친서민의 핵심
의미가 똑 같지는 않겠지만, 이 대통령이 엊그제 광복절 기념사에서'공정한 사회'를 친서민과 상생을 망라하는 국정 화두로 들고 나온 것은 반갑다. 정권 출범 초 기득권 중심의 인사와 정책으로 혼선과 비판을 자초하고 때론 분열적 정체성을 드러냈던 것에 비하면 나름 방향과 지표를 제대로 잡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실천의지를 담아야 할 최근의 장ㆍ차관 인사가 친정체제로만 흐른 것은 실망스럽다. 일을 도모하고 성과를 내려면 '뜻과 맛이 맞는'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해도, 보편적 국민 정서에서 벗어나는 인사의 과거행적이나 탈법사례가 공정성의 기본 틀을 해치고 진의도 희석되는 민감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같은 날 여야의 유력 정치인들이 국민의 구체적 삶을 돌보는 정치를 강조하고 나선 것도 흥미롭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모친인 고 육영수 여사 36주기 추도식에서 '공동체와 약자를 배려하는 행복하고 따뜻한 대한민국'을 얘기했고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여의도 복귀 회견에서 '함께 잘 사는 대한민국 공동체'를 25개월간의 성찰과 반성 끝에 얻은 정치적 비전으로 제시했다. 전당대회를 앞둔 민주당에서 제기되는 진보론 논쟁까지 감안하면 여야 가릴 것 없이 권력정치보다 생활정치로 몸을 낮추고 이것이 차기 대선의 주제가 될 것을 암시한다.
그런 만큼 이쯤 해서 친서민 담론의 성격과 내용, 범위와 한계를 정리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이 정부의 후원세력인 재계가 사회정의 잣대를 들이댄 친서민정책을 포퓰리즘 혹은 신기루라고 비판하고, 여당에선 서민금융을 놓고 포퓰리즘 또는 신관치금융 논란이 벌어지고 있어서다. 또 정부가 퍼붓는 서민세례의 출발점과 지속성을 낯설게 느끼고 걱정하는 '서민'들도 적지 않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정책의 범주와 대상이다. 지금 서민은 정치와 정책을 푸는 '만능열쇠'가 됐지만 정작 그 실체는 오리무중이다. 그나마 한나라당은 국민의 80%선인 중산층 이하 계층을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규정했지만 정작 정부는 어떤 정의도 내린 적 없다. 저소득 저신용 무주택 등이 큰 기준인 듯하나 구체적 조건은 정책마다 수시로 변한다.'서민을 따뜻하게, 중산층을 두텁게'라는 구호를 봐도 불분명하긴 마찬가지다.
정치적으로 접근한 서민을 이제 와서 엄밀한 사회과학의 틀에 집어넣으려는 작업자체가 무모하다는 지적이 나올 법하다. 하지만 정책 대상을 명확히 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마저 게을리하면 서민정책은 퍼주기 식의 선심정책으로 흐를 수밖에 없고 이에 편승한 도덕적 해이가 곳곳에서 똬리를 틀게 될 것이다. 인센티브를 잘못 설계해 역효과가 초래되는, 이른바'시장의 복수'다.
대상 분명해야 포퓰리즘 차단
더욱 중요한 것은 지지층 결집에 몰두하는 권력이 흔히 빠지는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유혹을 차단하는 일이다. 대통령이 얼마 전 포퓰리즘을 경계하며 시장경제적 처방을 강조한 것은 이런 맥락이겠다. 하지만 어지러운 논란을 피하려면 양자의 구분 잣대를 보다 명확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정책이 동력을 받고 포퓰리즘의 끝은 항상 비극이었던 역사적 교훈도 되돌아보게 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정부는 화려한 수사를 넘어 이제 공정성이 제대로 작동하는 시장적 제도와 장치를 고민해야 한다. 기회와 참여, 상생과 배려, 책임과 공존, 정의와 공평 등의 진보적 가치는 경쟁과 자유, 효율과 성장 등의 보수적 가치 위에서만 실현 가능한 까닭이다. 힘으로 시장의 강자를 눌러 약자를 보호할 수 있다면 배 고프고 배 아픈 고통이 아직도 남아 있을 리 없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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