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옥 지음
글항아리 발행ㆍ384쪽ㆍ1만9,800원
현대미술의 슈퍼스타 데미언 허스트를 발굴한 것은 광고 재벌 찰스 사치였고, 잭슨 폴록의 뒤에는 여성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이 있었다. 예술에 대한 애정과 밝은 눈, 그리고 재력을 갖춘 컬렉터의 존재는 미술의 역사를 떠받치는 든든한 힘이다.
조선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정조 때 문인 유한준(1732~1811)은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진정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소장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그저 모으는 사람과는 다르다”고 했다. 당시 유명 미술품 수집가 김광국(1727~1797)의 수집품을 소개한 화첩‘석농화원’에 쓴 발문이다.
의관이었던 김광국은 양반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서화 수집에 뛰어들어 ‘중인 컬렉터 시대’를 연 인물이다. 그는 약재 무역으로 번 재산으로 각종 미술품을 사모았다. 조선과 중국의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 등은 물론이고 네덜란드 동판화와 일본 우키요에까지 망라한, 그야말로 국제적인 컬렉션이었다. 또한 별도의 수장고를 지어 수집품들을 보관했고, 소장품 목록에 평을 곁들인 화첩까지 만들었다.
한국미술 역사를 공부한 일간지 기자가 쓴 은 이처럼 조선시대의 이름난 컬렉터들을 조명한 책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역사 속 이름들도 미술이라는 틀을 통해 새로운 면모로 다가온다.
책의 출발은 안견에게 자신이 꿈에서 본 광경을 그리게 해 ‘몽유도원도’를 탄생시킨 안평대군이다. 스스로 “그림을 좋아하는 게 병”이라고 토로할 정도였던 안평대군은 10대 때부터 서화를 수집하기 시작해 27세에 이미 중국의 시기별 대가들의 작품을 200여점이나 소장했다. 조선 화가 중에는 유일하게 안견이 그의 컬렉션에 이름을 올렸다.
폭군 연산군도 이 책에서는 궁중 미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는다. 직속 화원기구를 만들어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리게 하고, 기생 그림을 잘 그리는 화원을 승진시키는 등의 파격적인 스타일로 기존 유교 사회의 제도적 벽을 제거했다는 점에서다. 김홍도의 막강한 후원자였던 정조도 빼놓을 수 없는 미술 애호가다. 정조는 화원 시험에서 “모두 보자마자 껄껄 웃을 만한 그림을 그리라”는 문제를 낼 만큼 해학적인 풍속화를 좋아했다.
양반 컬렉터 중에는 김광수(1699~1770)가 유명하다. 부유한 명문가 출신이었던 김광수는 서화와 희귀서적, 금석문 등을 모으는 데 평생을 바쳤다.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를 보고 덜컥 그 나무가 서 있는 집을 비싸게 사들인 일도 있었다. 미술 애호가였던 연암 박지원이 “그 깊이가 깊지 못하다”며 그의 과시적 수집 태도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김광수는 “먼 훗날 나를 알아주는 자가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자족했다.
조선 최대의 서화 수장가로 꼽히는 이조묵(1792~1849)은 한 술 더 떠 왕희지 때의 것이라는 말에 말린 파리까지 샀을 만큼 수집벽이 심했다. 그는 공민왕의 거문고부터 중국 명화까지 가리지 않고 사들인 끝에 결국 말년에는 거처할 집조차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 밖에도 친구 정선에게서 받은 그림들을 팔아 막대한 이익을 올린 이병연, 추사 김정희의제자로 유배 당한 스승에게 변함없는 의리를 지켜 ‘세한도’ 탄생을 이끌어낸 역관 이상적, 일본의 침탈로부터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사재를 털었던 민족주의 컬렉터 오세창 등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그림의 가격이나 위작 세태 등 조선 미술계의 뒷이야기들도 흥미롭다.
김지원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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