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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절에서 하룻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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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절에서 하룻밤

입력
2010.08.13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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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나기가 갈수록 힘들다. 한 달 넘게 귀울음과 어지럼증에 시달리는 판에 열대야까지 겹치니 안 그래도 작은 눈이 떠지질 않는다. 병원을 다니고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다. 이 일 저 일 앞세우다가 몸이 앞서 가겠구나 싶어 쉬기로 했다. 바람도 잘 통하지 않는 아파트를 떠나 한가한 휴가지에서 만사 다 잊고 쉬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쉬는 것도 쉽지가 않다. 휴가철이라 어지간한 여행지는 죄다 예약 마감이다. 가격은 또 왜 그리 비싼지, 휴가 계획을 짜다가 병이 도질 지경이다. 결국 다 그만두고 절에서 하룻밤 자기로 했다. 값도 싸고 거리도 멀지 않은 데다 세면도구만 챙기면 된다니 간편해서 더 좋다. 한 가지, 불교 신자가 아닌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상관없단다. 정해진 예불에만 참여하면 된다고. 예불이 어떤 건지 본 적도 없어 슬쩍 걱정이 되긴 했으나, 신자가 아닌 줄 아니까 이해해주겠지 하고 목적지로 향했다.

절은 작고 소박했다. 입구의 웅장한 일주문도 없다. 대신 높지도 굵지도 않은 나무기둥 두 개로 만든 소탈한 문이 길손을 맞는다. 그 기둥 한 쪽에 "이 문안에 들어오는 이는 일체 지식을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하룻밤 나들이에도 500쪽짜리 책을 챙겨온 내게는 참 무거운 말씀이다.

경내로 들어서자 단청도 희미한 크지 않은 법당과 두어 채 한옥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절집은 한가하고 조용하다. 눈만 마주쳐도 착한 미소를 짓는 아가씨가 하얀 고무신과 바지저고리를 내주며 하룻밤 머물 방을 안내해준다. 툇마루가 딸린 한옥 맨 끝 방이 묵을 곳이다. 방으로 들어가 창문을 열자 돌담 너머 푸른 들판이 눈에 가득 찬다. 옷을 벗고 절에서 내준 바지저고리에 고무신을 신는다. 조이고 배기는 데가 하나도 없다. 반짝이는 햇볕이며 사방 통하는 바람이 아까워 빨래를 해 널고 툇마루에 앉았다. 어릴 적 이런 툇마루에 앉아 어머니를 기다리던 날이 떠오른다. 서편 하늘이 붉어진다.

남의 살이 없는 단출한 밥상을 물리고 어슬렁거리는데, 뎅뎅, 어스름이 깔리듯 종소리가 땅 위로 내려앉는다. 저녁예불 시간이다.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어찌할 바를 몰라 긴장해 있는데, 문득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다 말고 "저기가 왜 저리 더럽나?" 혼잣말을 하더니 다시 의식을 계속한다.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문안도 문밖도 다 사람 사는 세상이구나,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불 켜기가 미안할 만큼 캄캄한 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잡아채던 예민한 잠귀건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종일 재재거리던 새들도 다 잠이 든 걸까. 물 샐 틈 없이 완벽한 고요가 귀를 재운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하늘은 파랗고 햇볕은 개운했으며, 바람이 처마 밑의 풍경을 흔들며 지나갔다.

아침운동 삼아 절 뒷산을 올랐다. 우거진 수풀 사이로 작은 토굴이 보였다. 유명한 고승이 스스로를 가두고 용맹정진했다는 토굴이다. 컴컴한 토굴 속으로 들어서니 온몸에 냉기가 사무친다.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넣은 고승의 절박한 심정을 헤아린다. 문안에서도 문밖에서도 삶은 쉽지 않다. 산을 내려오는 길, 내내 웅웅대던 귀울음이 사라진 것을 알았다.

떠날 시간, 뙤약볕 아래서 하룻밤 은혜 입은 이들에게 하직인사를 했다. 이 더위에 어찌 가냐고, 아가씨는 미소 대신 걱정으로 배웅을 한다. 고맙다. 이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면 귀는 울어도 문밖의 삶 또한 견딜 만하리라.

김이경 소설가·독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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