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서울 인사동 서울미술관. 검정색 양복을 말끔히 차려 입은 노 신사는 벽 한 칸을 가득 채운 한 작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2008년 한 달여를 꼬박 매달려 노자 도덕경 전문을 한 글자씩 써 내려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 듯한 표정이었다. “전지 크기의 화선지 29장이에요. 기록으로, 유품으로 남기려고 사력을 다해서 그랬는지 완성하니까 기진맥진하더군요.” 옆에 있던 아내와 관람객들도 그에게 저절로 고개를 숙였다.
76년간 붓글씨를 써온 우죽(友竹) 양진니(82) 한국서예협회 고문이 그의 서예 인생을 총 정리하는 개인전을 열었다. 23일까지 인사동 서울미술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2006년 ‘한국서예 3대가전’ 이후 무려 4년만이다. 그는 “서예와 함께 한 일생을 정리하고 싶었다”며 “400여점의 작품을 엄선했다”고 말했다.
정자(正字)로 반듯하게 쓰던 기존 틀에서 변화를 꾀했던 안진경(중국 당나라 서예가)과 하소기(청나라 서예가)의 서체를 즐겨 쓴다. 그는 “자연스러운 서체를 추구하는데 한 획에서도 선과 형태의 변화가 많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일필휘지로 쓴 그의 작품들은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넘쳤다.
양 고문은 한학자였던 선친의 영향으로 여섯 살 때부터 붓을 잡았다. 재미없고 하기 싫었지만, 엿을 손에 쥐어주며 구슬린 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재능을 발휘했다.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조선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성리학자 미수 허목 선생을 모신 이의정(二宜亭) 현판을 써 놀라게 했다.
중ㆍ고교를 마치고 잠시 교편을 잡았던 그는 당시 서단의 원로였던 손재형(1903~81)에게 붓글씨를 가다듬으며 서예 동양화 서양화 조각 등 각 분야 예술가가 총 집결하는 국전(國展)에 꾸준히 참가했다. 그러다 16년만인 1974년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대표 서예가로 자리매김 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김성준 문화부장관을 통해 곽재우 장군 유적비를 그가 쓰도록 지시까지 했다. 이후 효창공원 김구선생 기념관의 의열문과 창열문, 경복궁 복원 때 새로 쓴 태원전 건청궁 경성전 청휘문 필성전 현판 글씨도 그의 손을 거쳤다. 안갑준 전 국회의원, 양찬우 전 내무부 장관 등 정계 인사들이 그에게서 한 수배우기도 했다.
양 고문은 붓글씨를 가르치는 서실을 마련해 서예보급에도 힘썼다. 특히, 대학에 서예과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국회에 청원서를 제출, 1988년 원광대가 처음으로 서예과를 개설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는 서예를 “수 천 년의 역사를 가진, 정신을 수양하는 심도 깊은 고등 예술”이라고 했다. 그러나 청소년 등 젊은 층을 비롯해 서예에 관심이 없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 평생을 서예와 벗하며 살아온 그로서는 아쉽기만 하다. “속도를 중시하며 아등바등 여유 없이 사는 요즘 시대에야 말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서를 순화하는 데 서예만큼 좋은 것이 없어요.” 그는 “60~70대 장년층을 중심으로 서예인구가 조금씩 늘고 있다”며 “서예가 재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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