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제작된 일본 영화 ‘메신저’는 자전거 택배원의 세계를 경쾌하고 신나게 그린 로맨틱 코미디다.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들의 발랄한 연기와 함께 눈을 끄는 것은 “오토바이로 택배 하는 나라는 일본 밖에 없다”는 남자 주인공의 대사. 바로 옆에 있는 한국이, 오토바이 택배가 가장 활발한 나라라는 사실을 몰랐던 모양이다.
영화 제목처럼, 자전거로 하는 택배 혹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을 자전거 메신저라고 부른다. 가까운 일본은 물론 멀리 유럽에서도 하나의 직업으로 정착된 메신저가 한국에서는 아직 생소한데, 그렇기 때문에 지음(34)씨는 어깨가 더 무겁다.
생각보다 빠른 자전거 배송
그가 인터뷰 도중 전화를 받고는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급히 물건을 전해달라는 주문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오후 6시가 조금 안된 시각에 그는 서울 용산구 용산동 남산 3호 터널 입구를 자전거로 출발해 40분이 채 걸리지 않아 마포구 망원동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카메라를 받아 동작구 상도동으로 전해주는데 소요된 시간 역시 비슷했다.
지음씨는 2008년 10월 홀로 메신저를 시작했다. 회사도 다니고 학원 강사도 하고 시민단체에서도 일했던 그가, 좋아하는 자전거도 타고 돈벌이도 할 요량으로 시작한 일인데 직접적인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자전거 타는 사람은 누구든 자연스럽게 메신저를 생각한다. 큰 돈은 못 벌어도 좋아하는 자전거를 타고 일할 수 있어서 좋다.”
지난해 6월에는 라봉씨가, 올해 5월에는 말랴(35)씨가 합류했다. 이들이 김아무개, 이아무개 같은 일반적 형태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자전거동호회 활동 등을 할 때 쓰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일이 밀릴 때는 친구 2, 3명이 도와주는데 여름철에 접어든 뒤로는 주문이 줄어 그들의 도움을 받을 일이 없다. 일행 가운데 라봉씨는 최근 휴직에 들어가기까지 했다.
자전거 메신저에 대해 소개하면 사람들은 흔히 오토바이만큼 빠르냐고 묻는다. “시간이 늦어서 문제된 적은 한번도 없다”는 말랴씨의 말에서 속도에 대한 자신감이 묻어난다. 서울 도심에서는 속도 차이가 거의 없으며 단거리일 경우 도리어 자전거가 더 빠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광화문에서 홍익대 부근까지 간다면 30분 안에 물건을 받아 30분 안에 전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여러 개의 물건을 동시에 배송하는 오토바이 퀵서비스와 달리 자전거 메신저는 배송물량이 적어 시간이 그만큼 적게 걸린다는 설명이다. 물론 먼 거리를 움직이면 오토바이에 비해 불리하지만 그때는 고객에게 예상시간을 미리 알리며 시간 맞추기가 정 어려우면 아예 주문을 받지 않는다. 가끔 경기 의정부, 고양, 과천 등으로도 가는데 그 때는 지하철에 자전거를 싣고 간 뒤 목적지 부근에 내려 다시 자전거를 달리기도 한다.
또 한가지 궁금증은 자전거로 나를 수 있는 물건의 부피와 무게가 어느 정도까지인가 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오토바이가 나르는 것과 꼭 같다고 보면 된다. 작은 서류 종류가 많지만 가끔 책 꾸러미나 큰 인형 등 50㎏ 안팎의 물건도 배달한다. 지음씨가 갖고 있는 화물용 짐 자전거는 100㎏이나 되는 물건도 나를 수 있다.
이들은 자동차가 가는 길은 어디든 갈 수 있을 정도의 자전거 실력을 갖고 있다. 가파른 언덕을 술술 올라가고, 도로에서 좌회전 신호가 나오면 차량 대열을 따라 자연스럽게 좌회전 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요즘처럼 뙤약볕이 내리쬐거나 호우가 쏟아질 때는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한겨울 한파가 닥쳤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웬만해서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지난 겨울 큰 눈이 내렸을 때도 자전거로 물건을 배송했다. 날씨가 너무 나쁘면 고객들이 알아서 배달을 시키지 않는다.
자전거가 많으면 도로도 안전
지음씨나 말랴씨는 메신저이기에 앞서 열렬한 자전거 마니아다. 지음씨는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자전거를 탔다. 서울시내를 움직일 때는 물론 경기 평택 심지어 대전에 갈 때도 자전거를 탔다. 2007년에는 결혼한 아내와 1년 가까이 동남아, 유럽을 자전거로 여행했다. 여행에서 “이런 식으로 자전거를 타며 여유롭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1990년대 말부터 제법 먼 거리를 오갈 때 자전거를 교통수단을 이용한 말랴씨는 지음씨보다 앞서 2004년 유럽을 자전거로 여행했다. 그때 유럽의 자전거 메신저를 여럿 만났는데, 그들은 메신저 챔피언십 대회를 열어 서로의 기량을 겨루는 등 이미 하나의 문화를 이루고 있었다.
지음씨가 밝혔듯 이들은 돈만 벌기 위해 메신저가 된 것이 아니다. 돈도 벌고, 자전거도 타고. 거기에 하나 더. 자동차 문명을 돌아보자는 사회적 발언을 하고 싶어서다.
다 알다시피 자동차를 움직이는 연료는 석유다. 석유 같은 화석연료는 각종 공해와 기후변화를 일으켜 지구의 생명을 위협한다. 교통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는 생명 또한 한둘이 아니다. 자동차를 타면 질주?욕망에 사로 잡히기 쉬운데 이들은 그것을 경쟁과 무한욕망의 또 다른 얼굴로 본다. 그에 반해 자전거는 사람의 힘으로 움직인다. 레이서가 아닌 한 빨라야 30㎞ 안팎의 속도이니 생명을 위협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자동차 운전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꼭 자동차여야 하는지 한번만이라도 생각해보라.”
서울은 특히 자동차 중심이다. 언덕이 많은 지형적 이유도 있지만 자동차 운전자들이 자전거에 너무 위압적이다. 그들은 자전거를 도로의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 약자 위에 군림하려는 강자처럼, 자전거를 용납하지 않는다. 양보하기는커녕 도리어 멸시하고 위협한다. 말랴씨는 “유럽여행에서 돌아온 뒤 서울의 난폭한 자동차 문화가 무서워 한동안 자전거를 탈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한번은 말랴씨가 남산 3호 터널을 자전거로 지나는데 교통순찰차에서 “자전거, 위로 올라가세요”라는 마이크 소리가 나왔다. 3호 터널에는 자전거가 올라갈 곳도, 갓길도 없다. 이륜차 통행 금지 표지도 없다. 그런데도 위로 올라가라는 것은 결국 그 길을 달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도로교통법상 자전거는 도로로 달리게 돼있는데도 교통경찰이 그것을 무시한 것은 한국 자전거 문화가 그 정도 수준이기 때문이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메신저가 된 뒤 한번도 사고가 나지 않은 말랴씨와 달리, 지음씨는 접촉사고를 두번 당했다. 다행히 가벼운 사고였지만 그 일을 겪으면서 자전거를 더 자주 타야겠다는 일종의 오기 같은 것이 생겼다. “거리에 자전거가 많이 다닐수록 도로와 도시가 안전해진다.”
메신저로 생계 유지 고민
이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두 사람이 단순한 메신저가 아니라 사는 방식이 도시의 일반적인 젊은이와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적은 수입에도 비교적 만족하고, 더 많은 돈을 벌겠다며 죽기살기로 일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민단체, 알음알음 아는 소기업, 자전거를 좋아하는 개인 등을 주요 고객으로 두었지만 안정적 일감을 주는 대기업과는 배송계약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여름철에 접어든 뒤로는 주문이 하루 3건을 넘지 못하니 수입이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들이 무난히 살아가는 것은 그만큼 아껴 쓰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국일보 2010년 신년 기획기사에서도 소개된 게스트하우스 빈집에서 살고 있는데 그로 인해 주거비와 생활비를 크게 절약할 수 있다. 빈집은 일종의 주거공동체로 한 달에 1인당 12만원을 내면 먹고 자는 것이 해결된다. 게다가 이들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돈벌이에 보내려 하지 않는다. 대신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수색 부근에 마련한 텃밭에서 콩 열무 시금치 깻잎 고추 토마토 호박 참외 등도 재배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하는 메신저 일이, 어떤 사람의 눈에는 치열하고 억척같은 자기 생존이 아니라 약간은 낭만적이고 치기 어린 생활로 비칠 수 있다. 그것은 이들도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듯 하다. 그래서 요즘은 조금 고민을 하고 있다. 자전거를 움직이는 메신저 일을 통해 생계를 온전히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자면 약간의 자본을 투입하고 사업적 마인드도 강화하며 인력도 늘려야 하는데 그렇게 구상은 하면서도 당장은 그럴 능력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오토바이 퀵서비스가 있는 상태에서 자전거 메신저가 자리를 잡았으니 못할 것도 없을 것 같다.
자전거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으니 메신저를 하겠다는 사람 또한 증가할 수 있다. 그래서 어느 틈엔가 서울시내에서 자전거가 레저의 수단이 아니라, 도시 물류의 축으로 자리를 잡을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박광희 편집위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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