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뜻밖에 계절의 호사를 누린다. 연일 질식할 듯한 무더위가 핑계다. 만사 작폐하고 일찍 귀가해선 길게 늘어져 TV리모컨이나 돌려대는 맛이 새삼 솔쏠하다. 그런데 어째 처음만큼 편치 않다. 도처에 매양 그 얼굴들이 나와 저희들끼리 희희낙락하는 프로그램들 때문이다. 이른바 예능프로들이다.
이런 유의 프로가 얼추 스무 종은 족히 넘는 것 같다. 재방송과 케이블TV까지 더하면 체감비중은 몇 배가 된다. 시간 점유율만큼 영향력도 대단하다. 뉴스포털의 오전 ‘실시간 이슈검색어’ 태반은 전 날 예능프로의 잡담내용이다. 이 정도면 사회현상이다. 전문적 대중문화 비평가가 아니어도 의견을 말할 자격이 생긴 셈이다.
정작 예능은 없는 변태프로들
예능(藝能)의 사전적 의미는 ‘연극ㆍ영화ㆍ음악ㆍ미술 등 예술과 관련된 능력’이다. 하지만 생활잡담, 허접한 농담만 낭자한 걸 보면 ‘예술적 재능’을 보여주는 프로들은 아니다. 입담이나 수다가 언제부터 예술적 재능에 포함됐던가?
TV 예능프로가 불편하고 심지어 불쾌하기까지 한 가장 큰 이유는 시선(視線)이다. 출연자들은 서로에게만 눈을 맞춘 채 그들끼리의 친분, 감정, 일상 등 사소하고도 개인적인 얘기를 노닥거린다. 엄연한 공적 공간이 그들끼리 잘 가는 카페의 구석자리, 또는 MT 장소쯤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시청자는 더 이상 주인이 아니다. 그들만의 세계 밖으로 밀려나 철저히 소외된 존재가 된다. 남들 노는 장면을 멀리서 그저 멀뚱히 지켜볼 뿐인 이런 포맷은 아주 저급한 수준의 ‘훔쳐보기’에 다름 아니다.
물론 관음증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남의 사적 영역을 보고 싶어하는 심리는 인간본성에 가깝다. 사실 영화ㆍ연극부터가 이런 본능을 건드리는 예술장르 아니던가. 그러나 영화ㆍ연극의 만들어진 현실을 보는 것과 소위 ‘리얼리티’를 표방하는 예능프로를 보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예능프로는 실제 사생활을 넘겨다보는 듯한 형식을 통해 훨씬 노골적으로 관음증을 자극하고 부추긴다. 훔쳐보기 놀이는 중독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러면 채널 선택조차 주입되고 통제된 행위가 된다. 시청자의 주체성이 작동할 여지는 없다.
형식과 함께 내용도 문제다. 도대체 연예인끼리 만나고 헤어지고, 싸운 일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천안함이 격침되든, 지방선거가 있든 이런 종류의 얘기가 어김없이 주요 이슈에 오를 만큼 예능프로의 이슈생산력은 압도적이다. 삶과 현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이런 프로들의 배후에 국가권력의 거대한 음모라도 있는 게 아닌지 의심될 지경이다.
나아가 초등학생 수준의 용어나 속담도 모르는 출연자들의 경악할 만한 무식과 천박함, 상호비방과 모욕, 외모에 대한 편견, 안하무인 식의 태도 등을 부끄럼 없이 보이고, 또 이를 용인하는 행태는 사회의 건강한 가치를 근본적으로 허문다.
1960년대 아도르노는 대중문화에 대해 지배층의 이익을 위해 대중의 욕망을 조작, 통제하는 수단이라고 비판했다. 대중문화가 허위욕구를 자극, 유포하고 주체의 참여를 방해함으로써 대중을 무비판적으로 순응케 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이후 문화엘리트주의로 재비판을 받았다. 소비자는 조작에 놀아날 만큼 무력하고 무지한 존재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지금의 TV 현실은 아도르노의 대중문화 비판이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준다.
시청자들부터 주체성 찾아야
나는 의 광팬이다. 시청자들의 즐거움을 위해 출연자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희극재능을 쥐어짜는 노력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들이야말로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진짜 예능인들이다.
국민의 평균 자질에도 한참 못 미치는 듯한 출연자들이 떼로 나와 히히거리면서, 아무 재능도 보여주지 못하는 사이비 예능프로들은 이제 적당히 정리됐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필요한 건 시청자들의 각성이다. 자기는 모르겠으되, 주체성 있게 자라야 할 어린 자녀들까지 멍청한 주변인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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