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일자리나 갈등은 있게 마련이다. 내가 총재직을 수행하면서도 업무상 적지 않은 갈등을 겪어야 했는데 그것은 정부와 언론 그리고 금융통화위원회와의 관계에서였다.
한국은행과 정부는 국정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동반자 관계에 있지만 한편 항상 긴장과 갈등의 관계에 있다. 정부는 으레 금리를 낮게 유지하고 돈을 많이 풀기를 바라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 정부가 한국은행의 정책결정에 직접 개입하려 할 때 두 기관의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이것이 다반사였다. 재무부가 금리를 어떻게 하라고 사실상 지시하거나 금융통화위원들에게 전화를 해서 지침을 내리는 일이 많았다. 지금은 그러한 일이 거의 없다고 보지만 내가 총재로 부임했을 때만 해도 그러한 옛 관행이 남아 있었다.
내가 한은 총재로 부임한 2002년의 일이었다. 경기가 호황국면에 들어서고 부동산 값이 크게 올라 금리인상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재정경제부에서 정부추천으로 임명된 금융통화위원들에게 금리를 올리지 않도록 해달라는 전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분들이 반대하면 금리는 올릴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옆방 비서진이 놀랐다고 할 만큼 고함을 치며 항의했다. 장관은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면 언론에 공개해서 국민들이 심판하도록 하겠다고 말하고 금통위원들에게도 이 사실을 공개하였는데 이 사건 이후로는 그러한 전화가 없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기관간의 갈등은 금융감독위원회(현재의 금융위원회)와의 사이에서도 자주 있었다. 이 갈등은 은행검사권에 대한 두 기관간의 이해상충이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두 기관은 관계법에 의해 공동검사를 하도록 되어 있는데 2002년 6월 25일 갑자기 금감원에서 공동검사를 할 수 없다는 통보를 해온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결국 금감원은 이를 자진 철회했지만 이 사건은 한은법 개정의 필요성에 방아쇠를 당긴 셈이 되었으며 한은의 은행검사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뒤에도 한은에 대한 은행 단독검사권 부여문제를 놓고 말이 많은데 한은이 금융안정을 위해 은행에 자금을 넣으려면 은행 자금사정을 단독으로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내가 겪은 업무상의 갈등은 언론과의 관계였다. 한국은행에는 약 80명의 신문 방송기자가 출입했다. 그래서 사실과 다른 엉뚱한 비판적 기사를 쓰는 기자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사석에서의 격의 없는 대화가 여과되지 않은 채 보도되어 곤욕을 치른 일도 많았다. 당연한 것인데도 언론에 말썽이 된 일도 있었다. 2005년 5월 19일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지는 한국은행이 외환시장에 인위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당연하고도 원론적인 나의 인터뷰 기사를 톱뉴스로 보도했는데 국제금융시장에서 환율과 주가가 술렁거려 문제가 된 일도 있었다.
또 다른 갈등은 한은 내부기관인 금융통화위원들과의 관계에서이다. 금통위는 한은의 최고 의결기관이고 총재는 그 의장이다. 따라서 한은과 금통위 그리고 총재와 금통위는 마땅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통위원들과 갈등을 겪은 일이 더러 있었다.
금통위는 의장을 포함 7인으로 구성되는데 한은총재가 추천하는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분은 사실상 정부가 임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한은 직원들은 금통위원들을 불신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금통위원들은 대개 인품이 좋은 분들이고 독립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업무에 있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정부와 한은이 이해를 달리하는 경우 또는 한은 집행부와 위원 개개인의 판단이 다른 경우에는 서로 갈등이 노출될 수 있었다.
2003년의 한은법 개정이 그러한 경우였다. 이때 법 개정의 초점이 금통위의 구성변경에 있었기 때문에 금통위원들은 한은의 독립성 강화를 위한 한은법 개정에 떨떠름한 입장이었다. 당시 이성태 부총재가 국회에서 금통위의 구성을 바꾸지 않으면 한은의 통화신용정책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막기 어렵다고 증언한 것을 두고 부총재를 징계하라고 들고 일어나 곤욕을 치른 일이 있다. 1997년 김영삼 정부의 한은법 개정논의 때도 교수 출신의 일부 금통위원이 공개적으로 정부안을 지지하여 갈등이 컸던 일이 있다.
또 다른 사례로는 2004년 11월의 금리 인하를 들 수 있다. 당시는 경기가 회복국면에 있었고 부동산 투기현상이 우려되는 상황이어서 나는 시장에 대해 추가적인 금리 인하가 어렵다는 암시를 한 바 있었다. 그래서 금통위원 한 분 한 분을 만나 11월의 금리를 동결하자고 설득했다. 그런데 막상 금통위를 열어본 결과 나와 이성태부총재 이성남(현 국회의원)위원만 동결을 주장하고 나머지 김태동 강문수 이덕훈 김종창 등 네 분은 3.5%의 금리를 3.25%로 내리자고 손을 들어 어쩔 수 없이 금리를 내리고 말았다.
결국 나는 시장에서 거짓말을 한 사람으로 비난을 받았고 당시 언론은 이를 ‘금통위의 반란’이라고 크게 보도했다. 의장으로서 나의 지도력 부족이며 제도적으로는 의사결정과정에 허점이 있다는 것을 통감했다. 그래서 미리 충분한 토론을 거쳐 완전히 사전조율을 한 다음 금리결정회의에 들어가도록 금리결정절차를 바꾸어 이런 문제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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