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부터 거실에 파리 벼룩시장에서 사온 아마추어 화가의 수채화 한 점을 걸어 두었다. 북프랑스 마얀 강 풍경을 그린 것인데 수면 위에 비친 건물의 그림자가 삐뚤어지고 강변의 숲도 엉성하다. 1930년대 그림이라 액자의 금칠도 군데군데 벗겨져 거뭇하다. 명색이 예술가임에도 정작 괜찮은 그림은 한 쪽에 밀어두고 아마추어 화가의 어설픈 그림을 걸어 놓은 취미를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다.
이 그림을 걸어둔 이유는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풍경화는 사람을 평화롭게 한다. 어린 시절, 시골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고 앉아 있으면 맞은 편 벽 위에 걸려 있는 두어 폭의 풍경화가 눈에 보였다.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마을에는 초가집들이 모여 있고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흐르는 푸른 냇물에 물레방아가 돈다. 지게를 진 농부는 소를 앞세우고 섶다리를 건넌다. 조잡한 키치(kitsch) 예술이지만 무릉도원을 상상하게 만드는 평화로움이 있다. 시골 소년이 처음으로 미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던 곳이 바로 이발소였다. 풍경화를 좋아하게 된 것도 한 달에 한 번씩 졸린 눈으로 바라보았던 이발소 그림의 기억 때문일지 모른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영국 근대 회화전'이 열리고 있다. 116점의 작품이 모두 풍경화이니 그림에서 무엇인가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날 수 있어 좋다. 풍경화는 역사적인 사건이나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우리들 주변의 사소한 일과 평범한 사람들과 자연에 대한 이야기다.
화가들은 풍경화를 그릴 때 정치나 종교, 신화와 같은 주제를 다루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누렸다.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자연을 대하라. 자연 속을 거닐며 자연이 주는 의미를 깨닫고, 그 속에서 들려오는 메시지를 기억하라"고 했던 존 러스킨의 말처럼 화가들은 자연과 진솔하게 대면하며 풍경을 맘껏 표현하기만 하면 되었다. 풍경화가 심오한 주제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신화나 종교를 다룬 그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지만 바로 이 점이 작가와 관객 모두를 이념에서 해방시킨다. 오로지 순수 자연과 예술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이념적 주제를 다루지 않아도 정작 풍경화만큼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그림도 없다. 바람 부는 들판으로 일 하러 가는 농부들의 뒷모습을 그린 데이비드 콕스의 그림이나 마차에 자갈을 실어 나르는 일꾼들과 양을 치는 목동들이 점경(點景)으로 묘사된 존 컨스터블의 그림, 폭풍이 오기 직전의 거친 바다를 표현한 윌리엄 터너의 그림을 바라보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진솔한 사람들로부터 인간 본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자연으로 돌아가 자신을 성찰하라고 했던 루소는 파리 동북쪽 깊은 숲에 둘러싸인 조그만 성에서 자연을 찬미하며 생을 마쳤다. 루소에 의하면 자연의 푸르름을 통해 인간은 잃어버린 본성을 회복하게 될 것임이 자명하다. 실제로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풍경화가 발전했던 것은 산업혁명의 폐해로 인한 반발심 때문이었다. 공업화, 도시화가 인간성을 황폐하게 만들자 사람들은 자연과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심을 가졌던 것이다.
산업혁명시대 영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연이 그리운 지금, 하루쯤 풍경화전에 다녀올 만하다. 자연은 비록 그림이라 할지라도 더위와 도시의 삶에 지친 우리를 치유하는 힘이 있다.
풍경화를 보는 데 특별한 지식은 필요하지 않다. 오디오 가이드나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려 하기보다 그림 속 숲길을 걷듯 여유롭게 화폭을 바라보는 것이 자연의 푸르름을 생생히 마음에 담을 수 있는 방법이다.
전강옥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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