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에 대한 고종의 책임을 둘러싼 논쟁이 재연됐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주최로 5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경술국치 100년, 회고와 성찰’이라는 주제의 학술대회에서다. 고종을 구국을 위해 자주외교에 진력한 군주로 보는 최근의 연구성과들이 논쟁거리가 됐다.
이날‘일제강점에 대한 집권세력의 대응’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한철호 동국대 교수는 고종은 암주(暗主ㆍ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라는 학계의 지배적 입장을 고수했다. 한 교수는 고종 옹호론자들이 을사조약 직후 고종이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에 밀서를 보내 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점을 강조하는 점에 대해, “이미 미국, 영국을 비롯한 서구열강이 일본의 한국지배를 인정 혹은 묵인해준 사실을 알지 못한 무지의 소치에 불과하다”라고 비판했다. 고종이 러일전쟁 당시 전시중립을 선언하는 등 중립외교를 추진한 점에 대해서도 한 교수는“자위력이 뒷받침이 되지 않은 중립선언은 한낱 고종의 착각이자 공염불”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주일한국공사관의 파행적 운영에 대한 비판도 눈길을 끌었다. 그에 따르면 공사관이 설치된 1887년 8월부터 1905년 12월 사이에 정작 주일공사가 부임해 근무한 기간은 6년 9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 때때로 주일공사관의 가장 말단인 번역관이 서리공사 직을 맡을 정도였다는 것. 한 교수는 “일본 국내의 동향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거나 각종 현안에 일본 정부와 적극 협상을 벌이는 외교관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조차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며 “이는 대한제국의 외교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반면 대한제국정치사 연구자인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고종을 국제정치 동향에 밝았던 군주로 평가했다. 서 교수는 “고종이 당시 일본에서 나온 신문을 모두 번역해 정독했다는 기록도 있고 일본 국민의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등 절대로 정보가 부족하지 않았다”며 “국권수호를 위한 중립화 정책 추진, 미국을 향한 구명외교, 열강에 대한 친서외교, 헤이그 특사 파견 등은 무지의 소치가 아니라 국제법 지식에 의거한 것”이라며 고종 무능론을 반박했다. 서 교수는“국제사회가 정의의 이름으로 약소국 문제에 개입해줄 것이라는 고종의 이상주의적 기대 등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국권수호를 위해 최대한의 외교노력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며 “대한제국과 고종의 무능으로 병합이 필연적이었다는 논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정당화 논리와 다를 바 없다”고 덧붙였다.
이왕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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