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에 대한 개인적 호불호(好不好)를 떠나 궐 안에서 ‘국모’ 가 살해된 사건은 이후 모든 한국인들에게 정신적 외상으로 남았습니다. 백범은 젊은 시절 일본군 장교를 살해했던 일을‘국모보수(國母報讎)’로 회고했고, 안중근 의사도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을 열거하면서 을미사변을 첫 번째로 꼽았습니다.”
일본 메이지시대 정치사상 연구자인 강범석(76) 히로시마시립대 명예교수가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의 성격을 구명한 연구서 (솔 출판사 발행)을 냈다. 을미사변은 사건 특성상 일본 쪽의 공식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고 사건의 배후 연구도 당시 사건을 주도했던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일으켰는지, 일본 정부가 일으켰는지로 집중된 것이 특징. 강 교수는 “사건이 사건인 만큼 ‘개인’차원의 결단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도 아니고, 내각의 공식적인 결정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도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이 정도의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실세들’은 누구였을까에 초점을 맞췄다. 관련자들의 회고록 등 비공식 기록들의 행간 읽기에 주목한 이유다.
저자는 사건 배후로 당시 일본 총리였던 이토 히로부미와 이토의 정치적 맹우로 주한공사 출신의 이노우에 가오루, 조선군사령관 출신으로 일본군벌의 대부로 불리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3명을 지목한다. 2차 이토 내각(1892~1895)의 실세 3인방으로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사건을 사주했으며, 사건의 전개를 예측하고 있었다고 강 교수는 추론한다. 가령 미우라 고로의 에는 을미사변 직후 구속된 미우라가“이토든 이노우에든, 그리고 야마가타든 간에 내가 좋아라고 간 것이 아니고 무리하게 보낸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돌아보는 대목이 나온다. “공식문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회고록에는 사건의 실마리가 숨어있다”고 강 교수는 강조한다.
일본 군대를 동원한 왕비 시해가 실효된 국제조약에 근거한 무법적 사태임을 밝힌 점도 눈에 띈다. 일본은 을미사변 1년 전인 1894년 6월 400여명이 넘는 대규모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면서 1882년에 맺은 제물포조약을 근거로 제시했다. 일본은‘일본공사관에 병원(兵員) 약간 명을 두고 경비하게 한다”는 조항을 출병근거로 내세웠는데 강 교수에 따르면 일본은 당시 이미 이 조약의 효력이 상실됐음을 알고 있었다. 제물포조약이 맺어지고 3년 뒤인 1885년 7월 주한일본공사 다카히라 코고로는 공사관의 호위병력을 철수시키며 “유사한 사태(임오군란 당시 구식군대의 일본공관 습격)가 일어나면 응당 다시 ‘파병호위’한다”는 공문을 조선 외교당국에 보냈다는 것. 제물포조약이 유효하다면 구태여 이런 공문을 보낼 필요가 없었다고 보는 강 교수는 일본군의 조선출병에서 을미사변에 이르는 과정은‘침략’이 명백하다고 강조한다.
명성황후 사진의 진위 여부에 관한 논란도 정리했다. 머리에 화려한 비녀를 꽂은 여성의 사진은‘명성황후’라는 설명으로 교과서에까지 실렸지만 논란 끝에 1997년 사라졌다. 그러나 이 사진은 이미 1895년 2월 일본에서 나온 에 ‘조선궁녀’로 게재되는 등 당초부터 명성황후가 아니었음이 알려져 있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는 이승만이 집필, 1910년 미국에서 발행한 에 ‘명성황후’라는 설명과 함께 실린 사진을 주목한다. 황후를 직접 보았을 가능성이 높은 박영효나 윤치호, 한규설 등은 이 나올 당시 생존해있었으므로 이들이 황후 초상에 대해 언급한 것이 밝혀진다면 명성황후 사진에 대한 논란이 정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한국일보 기자 출신으로 주일대사관 공사, 오사카시립대 법학부 객원교수 등을 지냈다. 메이지시대 일본 정한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메이지유신과 갑신정변에 관한 여러 편의 저작을 발표했다. 4년 전 갑신정변 연구서인 을 냈던 강 교수는 “갑신정변, 을미사변, 임오사변(임오군란)은 한말을 규정하는 3대 사변”이라며 “힘이 닿는다면 임오사변에 대한 연구서도 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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