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는 정치권에 입문한 뒤 최연소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1998년 자신의 고향인 경남 거창에서 초대 도의원을 지낸 뒤 2002년 불혹의 나이인 40세에 전국 최연소로 거창군수에 당선됐다. 그 뒤 2004년 42세의 나이에 경남지사 보궐선거에 당선돼 전국 최연소 광역자치단체장이 됐다.
김 후보자는 2006년 지방선거에서도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6년간의 도지사 재임 시절 남해안 시대 프로젝트와 역발상 행정으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남해안권을 동북아의 새로운 경제 거점으로 육성하자는 남해안 프로젝트는 국회 입법을 통해 국책사업으로 확정되는 성과를 거뒀다.
김 후보자는 집무실에 지도를 거꾸로 걸어 놓거나 경남이 망하는 방법을 찾아내라는 과제를 던지는 등 행정의 획기적 발상 전환을 촉구하며 관심을 모았다. 그는 4대강 사업에 적극적이었고 공무원 노조의 민주노총 가입에 대해선 강력히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 초 돌연 6월 지방선거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중앙정치 무대로 옮길 것이라는 관측을 낳았다. ‘박연차 게이트’ 연루 때문에 경남지사 3선을 포기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차기 총리와 장관 하마평에 끊임없이 올랐다. 결국 이번 개각에서 총리로 박탈되면서 차기 대선주자 그룹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이처럼 그는 엘리트 코스를 빠르게 밟아왔지만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62년 경남 거창군 가조면 일부리 부산마을에서 소장사를 하던 아버지 규성(76)씨와 어머니 정연조(75)씨의 3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개구쟁이였던 어린 시절 소 먹이러 가던 기억 등을 떠올리며 스스럼 없이 자신을 ‘촌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김 후보자는 당시 가난한 살림 때문에 가조중학교만 졸업하고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농사를 짓더라도 농약병에 적힌 영어가 무슨 뜻인지는 알아야 한다”는 부친의 교육열에 자극을 받고 거창농고에 입학했다. 그는 서울대 농업교육과에 진학하기 위해 잠을 4시간 가량만 잠을 잘 정도로 강한 집념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부친은 자식들이 대학을 졸업한 뒤에야 소장사 일을 그만뒀다고 한다. 김 후보자는 이후 서울대에서 교육학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대학 시절 김영삼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고 김동영 전 의원의 집에서 하숙을 하면서 정치 감각을 키웠다. 부친의 친구인 김 전 의원의 집은 김 전 대통령의 외곽조직인 민주산악회의 거점 역할을 했다. 그는 당시 음식 등 무거운 짐을 지고 정치인들과 함께 산을 오르기도 하고 권력의 눈을 피해 심부름도 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89년 육군 병장으로 전역한 뒤 서울대 등에서 강사를 지내다가 고향 선배인 이강두 민자당 국회의원의 보좌관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인 정치 수업을 하게 됐다. 김 후보자는 보좌관을 지낸 뒤 95년 한나라당의 여의도연구소에서 사회정책실장을 맡았다. 그는 98년부터는 고향으로 돌아와 도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됐다. 현재 그는 부인 신옥임(46)씨와 1남1녀를 두고 있다. 그가 존경하는 인물은 이순신 장군이다.
8일 김 후보자의 고향 마을은 잔치 분위기였다. 고향 집에는 지인과 마을 주민들의 축하 전화가 줄을 이었다. 김 후보자의 아버지 규성씨는 “태호는 어릴 적부터 대범하고 옳다고 판단되는 일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다”면서 “총리 재임 기간에 국민에게 큰 이익을 주는 국정 운영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창원=이동렬기자 dylee@hk.co.kr
고성호기자 sung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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