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플에게 문 닫으라더니… 시장 변화 역풍 딛고 일어설까
1997년 10월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 수 천명의 정보기술(IT) 전문가들이 모인 컨퍼런스에서, 연단에 선 남자는 '애플을 회생시킬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한다. "나 같으면 당장 회사 문을 닫고 남은 돈을 주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겠다." 애플 회생을 위해 이제 막 최고경영자(CE0)로 복귀했던 스티브 잡스에게 이처럼 대담하게 '굴욕'을 안겨준 남자는 누굴까.
세계적 컴퓨터 제조회사 델(Dell)사의 창업주이자 CE0인 마이클 델(45)이다. 델사은 국내에서는 비교적 인지도가 낮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 전세계 PC시장 점유율 부동의 1위를 자랑한 굴지의 기업. 하지만 1984년 이 회사가 처음 생겼을 때는 19세의 CEO 델과 단돈 1,000달러가 전부였다.
유통혁명으로 승승장구
치과의사 아버지와 증권 중개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델은 어릴 적부터 경제 관념이 남달랐다. 7세 때 계산기를 사고, 12세 때는 사람들이 소장하고 있는 우표를 모아 중개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팔아 2,000달러를 벌었다.
컴퓨터와의 만남이 시작된 건 15세. 생일에 부모님으로부터 컴퓨터를 선물 받은 델은 그날 작동 원리를 알기 위해 컴퓨터를 모두 분해하기도 했다.
텍사스대 의대 시절 컴퓨터 부품을 조립해 주변사람들에게 싸게 팔던 델은 시중 컴퓨터의 중간마진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고 직접 판매방식으로 사업을 하면 성공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컴퓨터 업계에선 한 번도 시도된 적 없는 방식이었기에, 모두들 델의 시도는 곧 망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회사를 차린 지 8년 만인 27세에 델은 최연소 세계 500대 부자가 됐고 31세에는 억만장자에 입성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보다도 갑부의 반열에 오른 나이는 더 빨랐다.
델의 유통혁명, 즉 컴퓨터 직접 판매 방식의 이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중간마진이 없으니 IBM, 컴팩, 휴렛팩커드(HP) 보다 가격이 평균 20% 가량 저렴했다. 또 전화나 인터넷으로 주문을 받은 후 부품을 조립하기 때문에 재고보유 기간이 4~5일로 경쟁사들(30~90일)의 1/10 수준이었고, 고객마다 맞춤형 컴퓨터 생산도 가능했다.
실제로 비용 절감에 대한 델의 집착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한 번은 부품 공급업체 직원이 회의 자리에 간식을 가져오자 델은 버럭 화를 냈다고 한다. 간식 살 돈이 있으면 공급가를 낮추라는 것.
델은 90년대 중반 인터넷을 통한 직접판매가 본격화되며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자체 전산실이 있어 사후관리(AS) 해줄 일이 없고 부서별로 원하는 사양이 다르다는 점에 착안, 개인보다 기업고객을 겨냥했으며, 원하는 사양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홈페이지를 200번 넘게 바꿨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델은 기업경영의 최대의 적으로 '자기 만족'을 꼽았다. 그래서 엄청난 판매실적을 거둔 직원에게도 칭찬은 짧게 하고 향후에는 더 나은 판매법을 찾아 보라고 독려하곤 했다. '5초간 승리를 기뻐한 뒤, 무엇을 더 잘할 수 있었는지 5시간 반성하라'가 슬로건이었을 정도. 미국의 경제주간지 비즈니스 위크는 델의 성공 비결을 직원을 항상 긴장케 하며 저비용이 몸에 배도록 한'압력솥(Pressur-cooker) 기업문화'에서 찾기도 했다.
델사는 2001년 세계 PC시장 점유율 1위에 등극한다. PC시장의 불황에도 불구, 델만 유독 '나홀로' 흑자를 기록하는 등 직접판매를 통한 박리다매 전략은 전천후였다. 그런 델사를 업계에서는 백상어라 불렀다. 모든 적(경쟁사)을 먹어 치우는 가장 크고 두려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좌절 그리고 재기
그러나 2000년대 중반으로 가면서 PC업계의 흐름은 바뀌고 있었다. 데스크톱에서 노트북으로, 대량 구매에서 개인 구매로의 변화 속에서 매장을 찾아 직접 시험해보고 살 수 없는 델의 판매 방식은 점점 외면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2006년에는 일본에서 델 노트북 폭발사건이 일어나 최대 규모의 리콜을 실시했다. 결국 그 해 HP에 세계시장 1위 자리를 빼앗기고 만다.
"직접 판매 방식은 혁명이었다. 그러나 종교는 아니다." 2004년 CEO에서 물러나 회장직만 맡고 있던 델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2007년1월 다시 경영에 복귀하며 이렇게 말했다. 변화가 시작됐다. 1만3,000여 개 소매점과 파트너 계약을 맺어 간접판매를 확대하고 인터넷 서비스 등 사업 확대를 위해 10여 개 회사와 공격적 M&A에 나섰다. 비용 절감에 치중하며 얻은 '싼티'이미지를 벗기 위해 PC 고급화에도 힘을 쏟고 있다.
97년 델에게 망신 당한 후 절치부심했던 잡스는 2006년 애플의 시가총액이 델사를 따라잡자 직원들에게 "델의 예측이 틀렸다"는 이메일을 보내 설욕했다.
HP에 1위 자리를 내줬던 델사는 지난해 대만의 에이서에도 밀려 3위로 내려앉았다.
과연 델은 이대로 끝나는 것일까. 잡스의 코를 다시 납작하게 만들 수 있을까. 델을 그리워하는 이들도 많지만, 재기의 길은 험난해만 보인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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