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혜경 지음 한겨레출판 발행ㆍ240쪽ㆍ1만2,000원
돌ㆍ바람ㆍ여자 삼다(三多)의 섬, 제주도는 신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제주 사람들은 1만 8,000위의 신이 있다고 말한다. 이 많은 신들의 뿌리는 한라산이 무릎 밑에 온다는 거대한 여신, 설문대할망이다. 지금도 제주 사람들은 마을 당집에 갈 때 “할망한테 간다”고 말한다. 제주 땅 곳곳에 설문대할망의 자취가 있다. 예컨대 성산 일출봉은 설문대할망의 등경돌(등불을 켜는 돌그릇)이다. 할망은 여기서 솔불을 켜고 길쌈을 했다.
하지만 설문대할망 신화는 온전한 이야기 구조를 갖추지 못한 채 파편처럼 전해져, 그동안 신화로서 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제주 심방(무당)들이 굿을 할 때 일일이 불러내는 신들의 긴 명단에도 빠져있으니, 할망이 서운하겠다. 더러 동화나 그림책이 할망을 기억할 뿐이다.
는 위대한 창세여신으로 설문대할망을 본격적으로 조명한다. 동서양 고대 신화 속 세계의 위대한 여신들과 비교하고 분석해 설문대할망을 그들과 나란히 한자리에 올려놓는 첫 책이기도 하다.
설문대할망 이야기는 유쾌한 스펙터클 판타지다. 제주도의 크고작은 오름 360개는 할망이 수수범벅을 먹고 뿜어낸 설사다. 제주 동쪽 우도는 할망의 거센 오줌발에 땅이 떨어져나가면서 생긴 섬이다. 섭지코지 앞바다에서 자궁으로 고기를 낚은 이야기는 압권이다. 설문대하루방이 자신의 거시기로 바다를 휘휘 젓자 물고기들이 놀라 반대편으로 달아났는데, 할망이 다리를 벌리고 있다가 하문으로 모두 빨아올렸다고 한다.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는 이 장면은 원초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태초의 여신으로서의 설문대할망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할망은 인간들과 협상도 했다. 속옷을 만들어주면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그런데 필요한 명주 100통(1통은 59필) 중 딱 1통이 모자라 속옷이 완성되지 않자 다리를 놓다 만 흔적이 조천면 조천리, 신촌리 등의 앞바다로 길게 뻗은 여(물에 잠긴 바위 줄기)라고 한다.
할망의 죽음 또한 신치고는 별스럽게 인간적이다. 키 자랑을 하려고 제주의 깊은 물에 다 들어가보다가 물장오리(한라산 중턱의 산중호수)에 빠져 죽었다. 밑이 터진 물인 줄 몰랐던 것이다.
이 책은 설문대할망 신화를 여러 문화권의 비슷한 모티프와 비교함으로써, ‘태초의 신은 여신이었다’는 고고학자 마리야 김부타스의 가설을 지지한다. 길쌈, 속옷, 다리, 물고기, 똥, 오줌 등 설문대할망 신화의 요소들을 공유하고 있는 세계의 신화를 나란히 소개하고 그 의미를 풀이한다. 예컨대 길쌈은 씨줄과 날줄로 옷감을 짜듯 우주를 창조하는 행위이며, 고대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 여신, 밤하늘의 별 직녀, 우리나라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의 세오녀 등 여신들의 몫이다. 신에게 옷을 지어 바치는 것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는 고대의 전통이다. 저자는 설문대할망의 속옷이 완성되지 않아 다리 또한 완성되지 않은 것을 인간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풀이한다. 또 할망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기 위한 상징적 죽음이라고 본다.
신화학자이면서 꿈 작업가인 저자 고혜경(47)씨는 신화와 꿈을 연구하다가 설문대할망을 만났다. 미국 위즈덤대학 유학 중 잠시 귀국했을 때 책방에서 설문대할망 이야기를 우연히 읽고는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이렇게 힘있는 우주 창조 여신이 이 땅에 살아있었구나!” 하고.
그는 “외국의 신화 연구자들에게 설문대할망을 들려주면, 이렇게 강렬하고 생명력 넘치는 신화가 있느냐고 다들 깜짝 놀라더라”고 전하면서 “설문대할망 신화에는 시공을 초월하는 신화의 원형이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것을 인류의 ‘정신적 DNA’라고 표현했다.
저자는 이 위대한 여신을 되살리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고 강조했다. 그는 “남성 신들의 신화 시대로 들어가기 전, 인류 초창기는 위대한 여신들의 시대였다”며 “경쟁과 가부장적 위계가 두드러지는 남신 시대의 신화와 달리, 여신들이 지배한 태초의 신화는 평등, 평화, 상생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이 도래한다’는 시인 김지하의 말을 인용하면서 “태초의 위대한 여신들을 발굴해 오늘에 되살리는 것은 이성과 감성, 인간과 자연, 남성과 여성이 참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길이자 내 꿈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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