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리 앤더슨 지음ㆍ허진 등 옮김
플래닛 발행ㆍ1176쪽ㆍ4만8,000원
‘혁명과 저항의 아이콘’ 체 게바라(1928~1967)에 대한 전기나 주변인의 회고록 등은 숱하게 나왔지만 미국 언론인 존 리 앤더슨이 쓴 평전 은 가장 압도적인,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해도 무리가 없겠다. 1,176쪽이란 방대한 분량도 그렇거니와 1997년 이 책이 나올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풍성하게 공개, “가장 뛰어나고 철저한 전기”“게바라의 초상이 그 어느 때보다 완전해졌다” 는 등의 찬사를 받았다.
1990년대부터 다시 불어닥친 ‘게바라 신드롬’을 연 책은 이보다 2년 앞서 출간된 프랑스 언론인 장 코르미에의 평전(국내 번역본은 2000년 출간)일 테다. 하지만 코르미에의 평전이 ‘전사 그리스도’라는, 다소 신화적이고 감상적인 이미지로 체를 그리는 데 반해 앤더슨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입체적인 모습으로 체를 복원하고 있다. 무엇보다 철저한 자료 조사와 방대한 주변 인터뷰로 독보적인 팩트를 확보했고, 알려지지 않은 대목은 그대로 백지 상태로 두는 등 저널리즘 정신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뉴요커’ 등의 중앙아메리카 담당 기자로 활동한 앤더슨은 1993년부터 아예 아바나에 살면서 체의 부인 알레이다 마르치로부터 체의 미공개 일기를 입수했다. 또 체를 처형하는 데 관여한 볼리비아 장성들과 CIA 요원, 체를 직접 죽인 마리오 테란까지 만났다. 그는 이 과정에서 1995년 볼리비아 장성 바르카스 살리나스로부터 28년간 베일에 싸여있던 체의 매장지에 대한 고백을 이끌어 내, 세계적 특종도 터뜨렸다.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이 기사로 볼리비아 정부는 실제 발굴 작업을 진행, 1997년 체의 유골을 발견했다. 코르미에의 책에서처럼 화장된 것으로 알려졌던 체 게바라는 사후 30년 만에 제2의 조국인 쿠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앤더슨이 복원한 체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는 체의 미공개 일기를 통해 쿠바 게릴라전 당시 첫번째 배신자였던 에우티미오 게라를 총살한 이가 바로 체임을 처음 밝혔다. “내가 32구경 권총으로 그의 머리 오른쪽에 한 방을 쏘아 문제를 종결지었다. 오른쪽 머리로 총알이 빠져나오면서 구멍이 생겼다. 에우티미오는 잠시 숨을 헐떡이다 죽었다.” 체의 냉혹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일텐데(쿠바 정부는 이 사실을 국가기밀로 통제했다), 앤더슨은 당시 카스트로가 사형선고만 내린 채 처형을 실행할 사람을 뽑지 않는 등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자 체가 한 것이라고 부연한다. 체의 냉혹성과 함께 초연한 결단성으로 해석될 여지를 준 것이다.
앤더슨은 이처럼 냉혹한 현실주의자, 영웅적 몽상가 등 제각각으로 받아들여지는 체에 대해 객관적 거리를 두면서 인간 그 자체로 그린다. 이를 해석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책이 사실에 충실하다고 해서 건조하거나 읽기 뻑뻑한 글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체의 마지막 순간 역시 관련자들의 인터뷰와 기록을 통해 세밀하게 복원됐는데, 어떤 감상적 묘사보다 소름 돋게 만든다. 감정의 찌꺼기를 배제하고 디테일에 충실한 문장이 얼마나 박진감 넘칠 수 있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전기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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