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하게도 무시에 가까운 외면에서 샘솟은 오기가 '축구여왕' 탄생의 원동력이 됐다.
'월드스타'로 떠오른 지소연(19ㆍ한양여대)의 이야기다. 전국민이 알게 된 축구소녀 지소연은 불과 3개월 전만 해도 '붉은악마'로 오인 받을 정도로 무관심 속에서 꿈을 키워왔다. 지난 5월 여자 성인대표팀 일원으로 2011년 월드컵 티켓을 따내기 위해 중국 출국 길에 오르기 전 한 사람이 대표팀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지소연을 보고 "붉은악마 아니에요"라고 물어봐 상처를 줬다.
이뿐 아니다. 지소연은 '호랑이 마크'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도 핸드볼, 농구, 배구, 하키 등의 선수로 오해를 받아 한 없는 서러움을 삼켜야 했다. 축구를 시작하고 12년 동안 "여자 아이가 축구는 왜 하느냐"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이뤄낸 지소연을 4일 밤 파주 축구트레이닝센터(NFC)에서 만났다.
한심스러웠던 독일과 준결승
6경기에서 8골을 터트려 한국 여자청소년대표팀(20세 이하)의 세계 3위 쾌거에 앞장 선 지소연은 독일과의 준결승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실버볼(최우수선수 부문 2위)과 실버슈(득점 2위)를 소중하게 만지작거리던 그는 '보고만 있어도 뿌듯하겠다'는 기자의 질문에 "황금색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준결승에서 1-5로 아쉽게 무릎을 꿇은 한국이 독일전에서 승리를 거뒀다면 골든볼과 골든슈의 주인공은 지소연이 됐을지도 모른다. 개인상에 대한 욕심을 접어두고라도 독일전을 회상하면 지소연은 화부터 치밀어 올랐다. 그는 "무서워서 피해 다니는 내 모습이 한심스러웠다"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독일이 홈팀인데다 관중의 일방적인 응원과 야유로 인해 위축됐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볼도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것 같다"며 "후반에서야 드리블도 하고 서서히 제 플레이를 했다. 우리 팀 전력의 70%도 발휘하지 못한 것 같다"고 토로했다. 그는 "독일전은 우리가 마치 힘도 안 빼고 하프매치를 했던 것 같은 느낌이다. 우리가 처음부터 위축되지 않았다면 대패하진 않았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곱씹었다.
세계를 뒤흔든 '작은 거인' 지소연에게도 세계최강 독일은 높은 벽이었다. 그는 "선수들이 얼굴도 예쁜데다 체격도 좋고 축구를 하는 게 꼭 남자 같았다"고 털어놓았다. 특히 골든볼, 골든슈를 차지한 알렉산드라 포프에 대해 그는 "진짜 남자 같았다. 신장도 좋고 스피드도 뛰어났다. 정교하진 않지만 파워가 빼어난 훌륭한 공격수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독일과 다시 맞붙는다면 이길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지소연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감은 언제나 충만하다. 다시 붙으면 이길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누가 뭐래도 축구는 내 운명
지소연은 처음부터 거칠고 투박한 축구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여느 또래 여자 아이처럼 그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등을 배웠다. 그는 "피아노 학원을 다니면서 악기 등을 연주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무언가를 하면 싫증을 금세 느꼈고 곧 그만두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지소연에게 '아주 재미있는 놀이'가 나타났다. 바로 축구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한 그는 축구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그는 "하루 종일 축구 생각만 했고, 공을 차면서 노는 게 가장 좋았다"며 "공부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축구만큼은 제일 오래 끈기 있게 한 것 같다"고 '축구는 내 운명'임을 강조했다.
남자 아이와 같이 섞여 축구를 하던 지소연은 "여자 애가 축구는 무슨"이라는 핀잔을 들었지만 오히려 실력면에선 또래들을 압도했다. 짧은 머리로 남자 아이들 속에서 공을 차는 그의 모습을 보고 축구부 선생님은 남자 아이로 착각, 축구부 가입을 제안하면서 지소연은 본격적으로 공을 차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유니폼을 찢는 등 축구부 활동을 반대했지만 그는 테이프로 유니폼을 붙여 가면서 경기를 뛰는 등 축구에 대한 강한 애착을 드러냈다.
이처럼 어떤 고난과 핀잔에도 굴하지 않았던 지소연은 결국 한국 축구 최연소의 나이(15세8개월)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또 그는 15세10개월 때 최연소 A매치 데뷔골을 터트리며 '축구여왕' 탄생의 서막을 알렸다.
모든 것을 해보고 싶은 소녀
축구 선수가 아닌 19세 여대생 지소연은 어떤 모습일까. 그는 "다른 또래들처럼 놀기 좋아하고 활발하고 까불 줄도 안다"라며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사진 촬영을 한다고 하니 "씻지 않아서 꾀죄죄한 모습인데 안 되는데"라며 머리를 가다듬는다. 또 환하게 웃어달라고 하자 "앞니가 벌어져서 예쁘지 않아요. 콤플렉스인데 꼭 보정해주셔야 해요"라고 내뱉는 지소연은 예쁘게 보이고 싶어하는 영락 없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친구들과 대회가 끝나면 워터파크와 수영장을 가자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전지훈련을 바로 가는 줄도 모르고 친구와 약속한 제가 바보였다." 지소연은 FIFA 대회를 끝난 뒤 다른 또래들처럼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지만 한양여대 축구부가 6일부터 충북 보은으로 전훈을 가는 까닭에 '달콤한 휴식'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는 대회 기간 중 수영복 입은 모습이 공개돼 화제가 됐다고 하자 "사실 그건 수영복이 아니라 속옷"이었다며 부끄러워했다.
귀국해서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을 물어보자 그는 "떡볶이, 순대와 같은 분식류요"라고 소녀 같은 소박한 어투로 답했다. 그는 "사실 라면은 대회 기간 중에 몰래 먹었어요. 매운 음식을 먹고 싶은데 특히 떡볶이와 김치찌개 등이 가장 먹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삼겹살'도 곧 먹고 말겠다는 다짐도 덧붙였다.
부르면 가슴 아픈 어머니
지소연은 4일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눈물을 흘렸다. 그는 "지금까지 어머니가 너무 고생을 많이 하셨다. 엄마께 너무 감사 드리고 앞으로는 정말로 좋은 일만, 좋은 일만 생겼으면 좋겠다. 엄마 사랑해요"라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렇게 울지 않으려 했던 지소연은 결국 어머니라는 이름에 참아왔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지소연의 어머니는 암 투병 후유증과 합병증으로 허리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자랑스러운 딸을 애타게 기다린 어머니는 입국장이 아니라 파주NFC에서 겨우 딸과 조우할 수 있었다. 지소연은 "그냥 말 없이 안아 드렸다. 어디 아픈데 없니, 몸은 괜찮니 등의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지소연과 어머니 김애리씨는 한 달여 만에 만났지만 함께 저녁을 먹지도 못했다. 지소연은 "숙소에서 같이 저녁을 먹긴 했지만 선수는 선수대로 학부모는 학부모대로 먹었다"고 아쉬워했다. 결국 모녀의 만남은 불과 1시간 여 만에 끝났고 지소연은 스케줄 탓에 어머니와 제대로 된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다.
대회가 끝난 뒤 '어머니에게 찜질방을 해주고 싶다'는 지소연의 바람이 화제가 됐다. 지소연은 이에 대해 "찜질방 이야기가 왜 이렇게 부각됐는지 모르겠다. 찜질방을 할 수 있는 돈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지금은 힘들 것 같다"며 미래를 기약했다.
진정한 축구인생 이제부터 시작
지소연은 이번 대회를 통해 '지메시'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별명에 대해 "마음에 들지만 부담스럽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그는 "달리면서 드리블하는 게 닮았다고들 하는데 메시팬들이 알면 욕할지도 모른다"고 쑥스러워했다. '지메시'라는 별명이 생겼지만 지소연은 '지소연' 그대로의 이름으로 팬들에게 기억되고 싶어한다. 그는 "지소연만의 플레이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 '키는 작지만 강한 아이'로 지금처럼 영원히 기억되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냈다.
한국 여자축구 최초로 미국 진출을 꿈꾸고 있는 지소연은 미국의 몇몇 팀으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중학교 때부터 미국무대에서 뛰고 싶었다. 미국에 진출한 한국 선수가 없기 때문에 한국에도 좋은 선수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입단하고 싶었던 LA 팀이 해체된 지금 지소연은 "어느 팀이라도 상관 없다. 가능하면 연말께 미국에 진출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아직 부족한 게 많다는 지소연은 "기술적인 면은 그렇게 부족하지 않지만 피지컬 밸런스와 스피드를 더욱 향상시켜야 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지금이 끝이 아니다. 열심히 노력할 테니 앞으로 더 많은 기대를 부탁한다"고 강조했다. 축구는 '11명이 함께 호흡하면서 골이라는 결실을 만들어 내는 작품, 그리고 관중이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지소연.
축구팬들이 한국여자축구에 대해 일과성이 아닌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파주=김두용기자 enjoysp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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