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통시장 공룡기업 손아귀에… 규제 없인 윈윈 없다"
국내 유통업계는 1996년 시장이 전면 개방된 뒤 규모의 경제를 추구함으로써 개방의 파고를 성공적으로 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치러야 할 '대가'도 적지 않았다는 게 솔직한 진단이다. 유통시장은 양극화로 치달았고,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특히 최근 들어 몇몇 유통 대기업의 독과점 체제가 구축되고 공고해지면서 사회적 갈등이 한층 심화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수많은 자영업자와 영세계층의 생계가 걸려 있는 유통업의 특성상 이 같은 왜곡된 구조를 뜯어 고쳐야만 대ㆍ중소기업 간 상생 협력은 물론, 우리 사회의 서민과 부유층,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반목과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길도 열릴 것이라는 지적이 높다.
독과점이 만연한 기형적 유통시장
우리나라 유통업계는 몇몇 대기업이 시장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기형적 구조다. 게다가 이들 대기업의 시장 점유율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현대백화점 등 이른바 주요 백화점의 시장점유율은 2008년에 이미 80%를 넘어섰다. 2001년에 61%였던 점을 감안하면 7년 사이에 무려 19%나 급증한 것이다. IMF 체제를 거치면서 재정 상황이 어려워진 군소 백화점이나 지방 소재 백화점을 인수하면서 경쟁적으로 상권 장악에 나선 결과다.
대형 마트시장에서도 홈플러스 등 주요 업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8년 기준으로 77%에 달했다. 대형 마트가 전체 소매업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98년엔 19%에 불과했지만 2008년에는 42%까지 치솟은 점을 감안하면 이들 대형 마트사들의 실질적 시장지배력은 훨씬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기업형 슈퍼마켓(SSM)의 경우는 상황이 훨씬 심각하다. 2005년 272개였던 점포 수가 지난해에는 695개로 2.6배 가량 늘었고, 같은 기간 매출액도 2조2,000억원에서 4조7,000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특히 사회적 논란이 거세지기 시작한 2007년 이후의 증가세는 오히려 폭발적이기까지 하다. SSM의 대표 가운데 하나인 GS슈퍼마켓은 이 기간에 점포 수를 36.9% 늘렸고, 홈플러스 익스프레스의 점포 수는 무려 97.4%나 증가했다.
문제의 심각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백화점과 대형 마트, SSM의 시장지배기업이 대부분 겹치는데다 이들 기업이 하나같이 TV홈쇼핑과 인터넷쇼핑몰, 편의점에까지 진출했거나 진출을 준비 중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유통시장 전체가 몇몇 공룡기업들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셈이다.
대다수 선진국, 세부적인 독과점 방지 노력
이에 비해 대다수 선진국들은 유통 및 도ㆍ소매업 시장에서 특정 기업들이 독과점 체제를 형성하거나 지역상권을 과도하게 파고들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다. 또 납품거래와 관련해 구체적인 불공정행위의 유형들을 적시함으로써 공정거래의 제도화를 유도하고 있다.
프랑스는 1990년에 제정된 '라파랭법'을 통해 대형 마트에 대해 강력하고 직접적 규제를 펼치고 있다. 대형 유통업체가 연면적 300㎡ 이상의 신규 점포를 출점할 경우 소형 소매업자 대표가 참여하는 시 지역위원회의 승인을 받도록 한 것. 인구 200만명의 파리에 대형 마트가 한 곳도 없는 건 이 때문이다. 대신 곳곳에 산재한 120여 곳의 중소 상가와 재래시장을 지역 명물로 성장시키고 있다.
독일은 대형 마트가 들어설 경우 기존의 소규모 상가들의 매출이 10% 이상 감소할 것이란 분석이 나오면 입점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른바 '10% 가이드라인' 제도 때문이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대규모 점포를 설치할 경우 주민설명회를 열고 교통ㆍ소음ㆍ주차 등에 대한 사전 영향평가를 실시토록 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도 대형 백화점들에 대해 최근 3년간 평균한 직접 매입 비중을 유지토록 함으로써 납품ㆍ입점업체에 대해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제도화했다.
영업시간을 규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영국에서는 대형 마트의 영업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가능하고,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경우 주중에는 오후 10시까지 영업을 허용하는 대신 일요일과 공휴일에는 휴점을 의무화하고 있다. 독일은 주중에 오전 6시부터 오후 8시까지 영업하되 일요일엔 반드시 쉬도록 제도화했다.
국회ㆍ대기업이 발목 잡는 일 없어야
국내에서의 유통구조 정상화를 위한 법제화 논의는 크게 두 갈래로 진행되고 있다. 사회적 논란이 큰 SSM을 적절한 수준에서 규제하자는 것과 대형 유통업체가 우월한 지위를 악용해 납품업자에 대해 불공정거래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막자는 것이다.
우선 SSM 규제 논의는 상당한 정도로 구체화했지만 현재는 답보상태다. 17대 국회 때부터 전통시장 반경 500m 이내 지역에선 SSM 개설을 제한하자는 暄횬?숱하게 발의됐지만, 대부분 해당 상임위조차 통과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올해 들어 같은 내용의 유통산업 발전법 개정안이 국회 지식경제위원회를 통과했지만 정부와 한나라당의 반대로 법사위에 발이 묶여 있다. 최근 들어 법안처리를 촉구하는 여론이 거세지면서 여권 내에서도 법안 처리 가능성을 거론하기 시작해 관심이 모아진다.
가맹점형 SSM을 사업조정 대상에 포함하는 내용의 대중소기업상생협력촉진법 개정안 역시 법사위에 계류 중이다. 정부ㆍ여당은 상생협력법이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위배될 가능성이 있다며 처리에 반대하고 있다. 지난 5월 국회 입법조사처가 "법안 내용이 WTO 협정에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는 보고서를 낸 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과 시민단체의 법안 처리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대형 유통업체와 중소 납품업체간 거래 과정에서의 불공정행위를 규제하는 법안은 최근에야 제정안이 발의됐다. 민주당 박선숙 의원이 발의한 이 법안은 불공정행위를 유형별로 구체적으로 적시한 것은 물론 불공정거래 행위 적발시 처벌 규정도 명문화했다.
한 유통업체 관계자는 "법안 처리가 늦어지면서 몇몇 대기업들이 의원들에게 로비를 벌이고 있다는 소문까지 도는 게 사실"이라며 "관련법들이 조속히 처리돼 유통업계의 왜곡된 구조를 바로잡게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김소연기자 jo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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