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랍ㆍ중동 외교가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국가정보원 직원의 스파이 혐의로 한_리비아 관계가 수교 이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는 데다 천안함사태 이후 대북제재에 공조체제를 구축해 온 미국이 대이란 제재를 강력하게 요청해 와 한_이란 관계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특히 대통령 특사 등 외교적 막후 교섭으로 풀릴 것처럼 보이던 한_리비아 외교갈등은 리비아가 우리측에 10억 달러 규모의 물리적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다시 악화되는 상황이다.
문제는 아랍ㆍ중동이 안보상 이익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동의 원유와 가스전 개발에 따른 대규모 플랜트공사는 우리기업에게는 놓칠 수 없는 ‘황금밭’이다. 특히 이란은 직간접 수출규모가 지난해 60억 달러, 올해 상반기 26여억 달러(코트라 집계)에 이를 정도로 중동에서 한국의 최대 수출지역이다. 외교부 한 관계자는 4일 “경제교류 규모가 크고 우리 기업들의 수익성이 좋은 이란과 좋은 관계유지가 중요하다”며 “하지만 천안함 사태 이후 우리 정부를 강력히 지지하며 대북제재에 보조를 맞춰 온 미국의 요청을 외면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최근 방한 방한한 로버트 아인혼 미 국무부 대북한∙이란 제재 조정관이 “한국이 유럽연합(EU) 수준의 이란 제재에 동참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우리 정부의 부담은 더욱 커지고 있다. 미국의 요구 수준은 군사적 교류 중단은 물론 금융 등 경제적 분야에서의 관계 단절까지 포함한다. 아인혼 조정관은 3일 기획재정부를 방문해 이란의 아시아 금융허브라 할 수 있는 멜라트은행 서울지점의 자산동결을 우리측에 요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때마침 금융감독원이 지난 6월부터 멜라트은행 서울지점에 대한 정기검사를 진행하고 있어 이란의 오해를 살 처지에 놓여 있다.
답답한 것은 미국의 요구를 비껴가기 어려운 우리의 입장이다. 아이혼 조정관이 지난 7월 중순 유럽을 방문한 직후인 7월26일 EU는 미국과 비슷한 대이란 제재안을 내놓았다. 또 일본 정부는 아인혼 조정관이 일본을 방문한 지난 3일 유엔 제재안과 별도의 대이란 추가 금융제재 방안을 내놓았다. 천안함 사태 이후 대북 제재에서 미국과 견고한 공조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만큼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기 어려운 처지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대이란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는 방안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당분간 이란을 자극할 행동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상황변화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게 정부 당국자들의 ‘대책 아닌 대책’이다.
일각에선 한국이 빠진 아랍∙중동 딜레마가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천안함 사태 이후 대미 의존도를 과도하게 높임으로써 외교에서의 운신의 폭을 좁혔다는 것이다. 홍순남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정부의 아랍∙중동 외교 전략이 정치적으로는 미국 전략에 따라 반대입장에 서고 경제적으로는 이익을 취하려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였다”며 “정부의 이런 정책이 이제 한계에 도달한 셈”이라고 말했다.
유인호기자 yi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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