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장병욱 기자의 경계의 즐거움] 대관령음악제의 진은숙 '아크로스틱 문자놀이'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장병욱 기자의 경계의 즐거움] 대관령음악제의 진은숙 '아크로스틱 문자놀이'

입력
2010.08.03 12:09
0 0

대관령국제음악제의 내년 제8회 행사부터 예술감독을 맡게 될 정명화씨가 지난달 31일 기자들을 만나 가장 기쁜 일로 꼽은 것은 강원 평창군 대관령면 용계리에 생긴 음악의 무대, 알펜시아 콘서트홀의 탄생이었다. “많이 접하지 못했던 곡들이 프로그램에 들어가야 밸런스가 맞고, 다음에 들어보면 더 좋게 느껴질 것이다.” 몇 시간 뒤, 그 말은 현실화했다.

올해 제7회 행사의 여덟번째 날인 그 날 오후 8시, 알펜시아 콘서트홀에서 이뤄진 현대음악과의 조우는 감동의 순간을 창출했다. 재독 작곡가 진은숙씨의 ‘아크로스틱 문자놀이: 일곱개의 동화의 놀이’(1993년작)는 바로크에서 낭만주의까지의 작품으로 이뤄졌던 음악제의 이전 무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을 제공했다. 관습적 음악에서는 부재했던 것들이 현현하는 데서 비롯된 음악적 사건들로 객석은 한 차원 고양됐다. 인간의 발성기관에서 나온 음, 정상음의 6분의 1까지 섬세하게 조율된 악기 소리 등이 조합돼 이뤄내는 7편의 소품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골프장만 있던 대관령 정상에 최초로 현대음악이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마치 큐 사인을 주듯 휘파람 소리가 홀의 허공을 갈랐다. 한국계 미국인 소프라노 유현아씨가 낸 그 소리를 이어 박정호씨가 지휘봉을 내저었다. 그를 따라 바이올린, 클라리넷, 플루트, 파곳, 피콜로, 하프 등이 연주를 해나갔다. 두 타악 주자의 손놀림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객석의 안이한 기대감은 허물어져 갔다. 콘트라베이스가 집요하게 내는 미끄러지는 소리에 만돌린이 음을 덧붙여 갔고, 불협화음이 서로 싸우듯 커져가는 사이를 소프라노가 뚫고 올랐다. 유현아씨의 기관은 극단의 시험을 받는 듯 했다.

낮고 음산한 목관에 맞춰 속삭이던 소프라노는 매혹적인 콜로라투라로 돌변했다. 그러다 일순 극도의 고음으로 치솟았고, 천천히 잦아들더니 마침내 소실됐다. 여느 무대에서는 접할 수 없는 기식(氣息)음도 한동안 이어졌다. ‘게임의 법칙_시간을 거꾸로’ ‘숨바꼭질’ 등의 제목을 갖고 있는 7편의 텍스트에 근거한 작품이었다. 무의미한 음절, 기계적인 알파벳음, 단절음 등으로 이어진 무대는 우리의 관습적 언어 규범을 근원적으로 돌아보게 했다. 3번의 열띤 커튼콜은 낯선 음악을 뜨겁게 환영했다.

이 음악은 진씨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알린, 이를테면.출세작이다. 일본 연주자들이 한국 무대에서 연주하기도 했지만, 이 날의 연주가 진정한 국내 초연이라고 현대음악 작곡가 강석희씨는 말했다. 진씨의 스승으로 이 날 무대를 지켜보기 위해 먼 길 오기를 마다않은 강씨는 “딴 데서 본 연주보다 더 화려하고 섬세하다”며 이번 음악제의 압권으로 꼽았다.

평창에서= aj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