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백화점업계의 주요 화두 가운데 하나는 윤리경영이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 보면 정직이나 신뢰와는 거리가 먼 모습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중소 납품ㆍ입점 업체들에 대한 갖가지 불공정행위가 좀처럼 근절되지 않고 있다.
3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주요 백화점들의 하반기 매장 개편 작업이 한창인 요즘 입점 업체들은 수심이 가득하다. 상반기 개편 이후 지난 6개월 간의 매출 실적을 바탕으로 입ㆍ퇴점과 매장 위치 변경 여부 등이 결정되는 시기인 까닭이다. 이에 따라 판매직원 통장에 입금하고 그 돈으로 자사 상품을 사게 해 매출을 일으키는 이른바 ‘찍기’가 성행하는 때이기도 하다. 롯데ㆍ신세계ㆍ현대백화점 등 주요 백화점에 모두 입점해 있는 한 중소업체 관계자는 “퇴점에까지 이르지 않고 매장 위치만 변경해도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며 “매장 위치가 매출 추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4,000만~5,000만원에 이르는 인테리어 비용 역시 입점 업체가 전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게 국내 백화점 업계의 운영방식”이라고 말했다.
자연히 중소 입점 업체들로서는 백화점의 바이어에게 잘 보이기 위해 거액의 선물 준비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주요 백화점들이 각 브랜드의 매출 실적 외에 향후 성장 가능성 등을 판단한 바이어 개인의 의견도 중요한 입ㆍ퇴점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입점 편의를 조건으로 협력 업체와 백화점 바이어 사이에 청탁성 선물이나 금품이 관행적으로 오가는 일이 다반사다. 2008년 말 현대백화점에서는 1억2,000여만원을 받은 혐의로 바이어가 형사 고발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최근 대형 유통업체 간 경쟁이 치열해진 것도 중소 납품업체에는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우선 백화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기획상품을 경쟁적으로 늘리면서“백화점이 일방적으로 정한 가격과 물량을 맞추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마이너스 수익이 뻔한 제품을 생산하는 일도 있다”는 게 납품업체 관계자의 말이다.
여기에 ‘소비자 편의’ 명목으로 연장영업이 잦아지면서 납품업체 직원들은 극한 경쟁으로 내몰리고 있다. 화장품 판매직원 위주로 구성된 전국 민간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 소속 노조원들은 지난해 8월부터 매주 대형 유통업체 앞에서 ‘영업시간 규제 및 주 1회 정기휴점제 선전전’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대형 유통업체가 기업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서비스 유통 노동자의 건강마저 위협하고 있다”며 지금의 월 1회 휴점제를 주 1회 휴점제로, 백화점 영업 종료시간을 지금의 오후 8시에서 오후 7시30분으로 바꿀 것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백화점 입점 업체들에게 현대백화점 일산 킨텍스점, 롯데백화점 청량리점, 신세계백화점 천안점 등 신규 출점 또는 재개장이 줄줄이 예정돼 있는 올 하반기는 또 한 번의 고비다. 백화점마다 자사 입점 업체들이 동일 상권 내 경쟁 백화점에 입점하는 것을 직ㆍ간접적으로 ‘방해’하는 횡포를 부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경쟁적으로 부산 상권 장악에 나선 신세계백화점과 롯데백화점 사이에서 많은 입점 업체들이 곤란을 겪기도 했다. 한 패션 브랜드 관계자는 “경쟁 백화점에 입점하면 자사의 서울 본점 점포를 철수시키겠다는 한 백화점의 요구에 매장의 위치를 바꾸는 것으로 절충해 협상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또 지난해 명동에 문을 연 한 쇼핑몰에 입점하려던 국내 의류 업체는 마주한 백화점 측의 직ㆍ간접적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입점을 포기하기도 했다.
부당한 단가 인하나 판촉비용 부담 강요, 상품권 구입 강요 등도 예사로 이뤄진다. 한 여성복 업체 관계자는 “지난해에만 특판행사에 참여한 게 17차례이고 이 때문에 추가로 들어간 비용이 3,000만원이 넘는다”며 “그런데도 명절 때면 어김없이 ‘우리 상품권 좀 구입해달라’는 전화가 온다”고 했다.
오세조 연세대 경영대 교수는 “최근 백화점 업계가 고소득층의 소비 회복을 이끄는 등 소비 활성화에 한몫을 담당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통합 경쟁력 차원에서 입점 업체와의 의사소통에도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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