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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46> 유극량(劉克良)의 살신성인(殺身成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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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46> 유극량(劉克良)의 살신성인(殺身成仁)

입력
2010.08.0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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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극량은 임진왜란 때 임진강 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조방장(助防將)이다. 그는 원래 천출이었다. 그가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집에 돌아오자 그의 어머니가 슬피 울었다. 그 까닭을 물으니 어머니가 “이 어미는 본시 사비(私婢)였는데, 하루는 잘못해 옥잔을 깨트려 죄를 받을까 두려워 도망쳐 너의 아버지를 만나 너를 낳았다. 그런데 내가 듣기로는 천출은 국법에 과거에 급제해도 삭과(削科)된다고 하니, 네가 필시 과거급제가 취소될 것 같아 슬피 우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유극량은 서울에 있는 상전 정씨집을 찾아가 그 사유를 낱낱이 말하고 과거급제를 포기하고 다시 종이 되기를 청했다. 상전은 이 말에 탄복해 그를 종에서 풀어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장교로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벼슬을 하면서도 항상 상전을 섬기고, 상전집에 갈 때는 동구 밖에서부터 예물을 손에 들고 걸어 들어가 공손히 인사를 했다고 한다.

유극량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방장으로서 임진강 전투에 투입되었다. 당시 총사령관인 도원수(都元帥)는 김명원(金命元)이었고, 도순찰사(都巡察使)는 한응인(韓應寅)이었다. 김명원은 군사를 임진강 가에 배치하고, 모든 배는 거두어 북쪽 강가에 매 두었다. 적은 강의 남쪽에 와서 강을 건너지 못하고 강가에서 도전했으나 조선군은 응전하지 않았다. 그러자 어느날 갑자기 적이 막사를 불태우고 퇴각했다. 아군을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방어사(防禦使) 신길(申石+吉)은 적의 계략에 빠져 강을 건너 추격하려 했다. 조방장 유극량은 연노하고 경험이 풍부한 무인으로서 경솔하게 강을 건너 진격하는 것을 반대했다. 신길은 그를 비겁한 사람으로 여겨 베어버리려 했다. 유극량은 기가 막혀 “내가 어려서부터 머리를 매고 종군한 사람으로서 어찌 죽음을 두려워 피할 것이오. 내가 이렇게 반대하는 것은 오직 국가대사를 그르칠까 두려워하기 때문일 뿐이오” 라고 하면서 진중으로 돌아갔다.

김명원도 유극량의 말을 옳게 여겨 신길을 말렸으나 따르지 않았다. 게다가 경기감사 권징(權徵)이 적세가 허약해졌으니 빨리 진격하게 해야 한다고 하자 선조는 한응인에게 김명원의 지휘를 받을 것 없이 빨리 진격하라고 했다. 이에 한응인은 전 병력을 이끌고 강을 건너갔다가 대패했다.

유극량은 신길과 의견은 다르지만 함께 진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 “여기가 나의 죽을 곳이다” 라고 하고 활로 적 수명을 쏘아 죽인 다음 장렬하게 전사했다. 대패였다. 김명원, 한응인은 선조가 있는 평양으로 갔으나 처벌받지는 않았다. 전쟁에 임해서 목숨을 바쳐 싸운 사람은 그것으로 그만이고, 작전에 실패한 장수는 살아남는 불공평이 있는 한 나라가 위태롭다. 유극량은 비록 천출이지만 진충보국(盡忠輔國)하는 정신은 양반보다 높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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