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1750~1805)는 북학파학의 동인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자전적 글을 남겼다. 27살 때에 쓴 길지 않은 글은 첫머리부터 그 사람됨을 진하게 압박한다.
“조선이 개국한 지 384년, 압록강에서 동쪽으로 1천여리 떨어진 곳에서 그가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신라의 옛 땅이요, 그의 관향(貫鄕)은 밀양(密陽)이다…. 그의 사람됨은 물소 이마에 칼날 같은 눈썹을 하고, 눈동자는 검고 귀는 하얗다. 고독하고 고매한 사람만을 골라서 남달리 친하게 사귀고, 권세 많고 부유한 사람은 멀리서 보기만 해도 사이가 멀어진다. 그러니 뜻에 맞는 이가 없이 늘 가난하게 산다.”(, 안대회 옮김, 태학사, 참조)
스스로 태어난 나이를 조선 개국으로부터 센 이 글은 압록강으로부터 사는 곳의 거리를 헤아리는 역사의식과, 북학(北學)의 의지로 자의식에 넘친다. “물소[伏犀] 이마에 칼날 눈썹과 검은 눈동자에 흰 귀”라 하여 귀인의 자부를 감추지 않고, 이런 인상은 연행(燕行) 때 청나라 문인 화가 나빙(羅聘)이 그린 군관 모습의 그의 초상화를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백 세대 이전 인물에게나 흉금을 터놓고, 만 리 밖 먼 땅에나 가서 활개치고 다닌다”고 한 교우도(交友道)는 ‘소전’을 쓴 다음 해에 동인시집()을 홍대용의 중국 친구에게 보내고, 스스로 4차례나 연행길에 오르게 한 북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소전’의 묘처(妙處)는 스스로의 성취를 요약한 찬(贊)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완연히 그 사람이라서 천만 명의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한 다음이라야 천애(天涯)의 다른 땅에서나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만나는 사람마다 분명히 그인 줄 알 것이다.”
뚜렷이 천만 사람과 다른 ‘그 사람’이란 자각은 개체로서 존재의 철학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고 뜻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되는 것[莫之爲而然者]”이란 말은 주자(朱子)의 ‘소이연(所以然)’인 이(理)인데, 초정은 이것을 ‘자연[天]’이라 하고, 다시 ‘사람(人)’과 대비하여 그 사이에 나뉨이 있다고 한 곳에 주자학에 대한 그의 대결의식이 있었을 터이다. 이렇게 ‘이’를 ‘천’이라 하고 이것을 사람과 관계항으로 세우는 뜻은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로 말할 수도 있고, 이런 점에서 초정이 1801년 신유사옥에 이가환(李家煥) 권철신(權哲身) 정약용(丁若鏞) 등과 함께 귀양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견해에도 귀 기울일 만하다.
초정의 네 번에 걸친 연행은 이덕무 유득공 박지원과 함께, 그의 뛰어난 제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에게서 북학(北學)으로 꽃피었다. 박제가의 셋째 아들인 박장엄의에는 청조 문인이 무려 172명이 나왔을 정도였다.( 유홍준,학고재, 권 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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