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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인터뷰] 고희에 美 진출하는 한국 록의 전설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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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인터뷰] 고희에 美 진출하는 한국 록의 전설 신중현

입력
2010.08.0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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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록의 살아있는 전설을 찾아가는 길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영동고속도로 하행선 양지 나들목을 나와 10분 가량 차를 달린 뒤 보이는 한 카페에서 신중현(72)씨를 만났다. 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그의 자택은 카페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2006년 은퇴공연을 앞두고 마련한 집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4년 동안 은거한 채 55년간 내달려온 ‘현 위의 인생’을 정리해 왔다.

마지막 콘서트까지 치르고 초야에 묻혀있던 그가 6월 26일 ‘신중현 기타 헌정기념 콘서트’를 열며 무대로 돌아왔다. 지난달 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공연에서도 성황을 이룬 그는 10월 23,24일엔 앙코르 공연을 할 예정이다. 12월엔 로스앤젤레스, 뉴욕 등 미국 4개 도시 순회 공연도 잡혀있다. 1973년 김정미가 노래한 ‘NOW’ 음반과, 그가 고른 곡들로 이뤄진 음반도 10월 미국에서 출시된다.

“조용히 살고 있는” 그를 무대로 불러낸 것은 미국에서 건너 온 한 대의 기타였다. 세계적인 기타 회사인 펜더(Fender)가 지난해 12월 그에게 자사의 명품 기타 스트라토캐스터를 헌정하면서 그의 생각지도 못한 복귀가 이뤄졌다. 신씨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기타를 받았으니 가만 있을 수 없었다. 다시 공연하라는 하늘이 내린 일종의 계시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신씨에 대한 팬더 기타 헌정은 에릭 클랩턴, 제프 벡, 스티비 레이본, 잉베이 맘스틴, 에디 반 헤이런 등에 이어 6번째이며 아시안인 최초다.

_그 동안 집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셨나요.

“(세상을 떠나) 가는 마당에 정리를 좀 해야겠더라고요. 제 음악을 인터넷에 올려놓고 정리를 하면 저의 음악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4년을 매달렸는데도 아직 반도 하지 못했어요.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니 시간이 많이 걸려요. 지금까지 대략 100곡을 올렸는데 누구나 제 홈페이지(www.sjhmvd.com)에 로그인만 하면 들을 수 있어요. 디지털이지만 아날로그 소리로 들리도록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제가 죽지만 않는다면 작업을 계속 해야죠.”

_기타는 여전히 많이 치십니까.

“그 동안은 거의 치지 못했죠. 그런데 기타 헌정을 받고 나니 부담이 생겼어요. 이 좋은 기타를 썩일 수 없으니 연습을 시작했죠. 최근 공연 연습할 때는 하루 대여섯 시간씩 다른 멤버들과 호흡을 맞췄죠.”

_세계적 대가의 기타 소리를 들으면 지금도 질투가 느껴지시나요.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제가 만든 연주법은 기존 주법과 아주 달라요. 저의 주법이 새로운 것이고, 전혀 다른 방향이니 다른 사람을 모방할 필요도 없어요. 제 나름대로 제 주법을 발전시키는 데에만 집중할 뿐입니다.”

“알게 되면 너무 실망할까 봐 키를 제대로 재본 적이 한번도 없다”할 정도로 단구지만 그는 17세 때 데뷔한 미8군 무대에서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가 빅밴드 뒷구석 자리에 앉아 자기 덩치만한 통기타를 치고 있으면 미군들은 조그만 녀석이라는 뜻의 일본말 “스코시”를 연호했다. 그의 기타 솔로를 듣고 싶다는 의미였다. 그는 “솔로가 뭔지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클럽 매니저가 건네준 음반 3장을 듣고 연습해 연주를 했더니 기립박수가 쏟아졌다”고 말했다. 한달 3,000원이던 그의 연주 수당은 금세 1만8,000원으로 껑충 뛰었다. 밴드 리더(2만 8,000원)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급료였다. 주한미군 방송과 미군 신문 성조지 등은 그의 인터뷰 기사를 앞다퉈 다뤘다. 그의 황금시대는 그렇게 활짝 열렸다.

그는 1962년 국내 최초의 록그룹 애드포를 결성하며 음악적 야망을 하나 둘 성취해갔다. ‘빗속의 여인’ 등 히트곡을 쏟아냈고, 펄 시스터즈(‘님아’ ‘떠나야 할 그 사람’ ‘커피 한잔’ 등), 김추자(‘님은 먼 곳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등) 등 톱스타를 연달아 제조해냈다. ‘6현의 연금술사’ 신중현 없는 한국 대중음악계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됐다.

_젊은 시절부터 활약이 대단하셨습니다.

“20세이던 1958년부터 히키신이라는 이름으로 경음악 앨범을 냈어요. 훗날 이화여대 교수가 되신 이교숙 선생님에게 화성학도 공부했어요. 그러면서 작곡활동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거죠. 당시 우리 대중음악 수준이 너무 뒤떨어져서 제가 그 수준을 끌어올리고 싶은 욕망이 생겼어요.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이었고, 대중음악이 천대 받던 시절이었죠.”

그래도 그는 “당시 음악인들이 지금 후배보다 훨씬 행복했다”고 말했다. “미8군 무대에 오르던 한국인 밴드만 200여 개이던 시절”이었다. “그때만큼은 음악수준이 세계적이었고, 대중음악인들의 생활도 풍족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_걸그룹 위주의 요즘 대중음악계가 부러워할 시절입니다.

“당시는 음악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었고, 음악이 천직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었어요. 일생을 바칠 수 있다는 의욕들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 때는 참 음악 문화가 잘 형성돼 있었어요. 지금은 정말 다르죠. 음악성이라는 것은 온데간데 없고 오직 상업적인 요소만 남았어요. 그냥 보여주는 것에 대한 효과음악으로 전락한 듯해요. 젊은이들만을 위한 아마추어 같은 음악들이죠. 프로라 할 수 있는 음악이 없으니 진정한 뮤지션이 설 자리가 없는 거죠. 지금 음악은 사실 음악이 아닙니다.”

1970년을 향하면서 한국 대중 음악계의 공연 문화는 급격히 빛을 잃는다. 주한미군이 베트남전에 대규모로 차출되면서 미8군 무대는 조금씩 좁아졌고, 연주자와 가수들은 큰 타격을 입는다. 신씨는 1970년대 중반까지 여전히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급작스레 대형 암초에 부딪힌다. 1975년 대마초 사건에 얽히면서 6현을 주유하던 그의 인생은 급추락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대통령 찬가를 만들어달라는 청와대 요청을 거절해 더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고 해석한다.

_한 달에 한 번 꼴로 음반을 낸 적도 있다면서요.

“1968년 펄 시스터즈 데뷔 음반이 히트하자 1주에 2,3번 녹음 스케줄이 있었어요. 음반제작자들이 아예 스튜디오를 잡아놓고 저에게 통보를 했어요. 거기에 맞춰 곡을 썼죠. 편곡을 녹음 직전 스튜디오에서 할 정도로 시간에 쫓겼죠. 3일씩 밤을 세우기도 했어요. 그래도 좋은 곡들이 많이 나왔어요.”

_전성기를 누리다 5년 동안 활동금지를 당하셨는데요.

“나이도 한창때고 의욕도 많을 때 활동금지를 당했으니 저로서는 무척 마음이 아팠죠. 나락으로 떨어진 듯한 느낌 같았어요. 음악 하는 사람에게 음악을 뺏어가면 삶에 아무 의미가 없죠. 해금이 된 뒤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았고, 함께 일했던 가수들과도 연락이 다 끊겼습니다. 그때 활동을 계속했으면 좀 더 좋은 곡을 쓰지 않았을까요.”

그의 아들 삼형제 대철 윤철 석철씨도 음악을 업으로 삼았다. 맏이 대철씨는 록그룹 시나위의 리더로 국내 최고 기타리스트 중 하나로 꼽히며 윤철 석철씨도 서울전자음악단 멤버로 기타와 드럼을 연주하고 있다. 이들은 아버지의 복귀 무대에 함께 올랐다. 그는 “나름대로 잘들 하고 있다”며 삼형제를 기특하게 여겼다.

_아들들이 다른 길을 걸었으면 하는 바람은 전혀 없었나요.

“전 아들들이 음악 하는 것에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그들이 좋아서 하는 일이고 제가 또 음악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어려서부터 조성했습니다. 삼형제가 제 음악을 너무 잘 알고 있어 함께 무대에 서면 전 굉장히 좋죠. 배는 고프겠지만 인생은 돈으로 산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자기들이 좋아하는 음악으로 인생 살아가는 게 제가 보기엔 참 바람직해요.”

_아들을 비롯해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많죠. 기타리스트 생활이라는 게 순탄치 않아 포기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다들 음악성보다 돈을 더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니… ‘진정한 음악을 해서 어디 가서 밥이나 먹겠냐’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그래도 음악을 하려면 모든 걸 이겨내야죠. 진정한 음악을 하면 풍족하진 않아도 생활은 할 수 있는 여건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도 해요. 그러기 위해선 다들 노력을 해야겠죠. ‘젊었을 때는 너무 겁내지 말고 도전해라. 그러면 그 대가가 반드시 올 것이다’는 말을 후배들에게 하고 싶네요.”

_혹시 음악이 질린다는 생각을 하신 적 없나요.

“그런 생각 해본 적도 없습니다. 음악이 없으면 저도 없습니다. 단지 제가 능력이 부족해서 음악을 제대로 못했을 뿐이지… 음악에 감동 받을 수 있는 신체 감각은 인간 밖에 없어요. 음악 덕분에 사람들은 삶의 의욕을 가질 수 있어요. 음악을 느낄 수 없다면 얼마나 불행한 인생일까요. 제 인생의 전제조건은 음악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용인=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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