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준 지음 한길사 발행ㆍ688쪽ㆍ1만8,000원
지리학자 최영준(69ㆍ고려대 명예교수)씨는 척 보면 영락없는 농사꾼이다. 굳은 살이 박히고 손톱 밑에 흙때가 묻은 거친 손은 책상물림 백면서생의 것이 아니다. 홍천강변 협곡에 집과 땅을 마련해 주말과 방학이면 내려가서 농사를 지은 지 20년이 넘었다. 300평 논에 벼농사를 짓고, 300평 밭에는 감자 고구마 땅콩 고추 등 10여가지 작물을 심어 돌본다.
우리 나이로 마흔아홉이 되던 1989년 어느날, 그는 조상 중에 그 나이를 넘겨 산 사람이 없음을 문득 떠올리고 농촌행을 결심한다. 나머지 생은 ‘덤’이니 욕심을 버리고 책 읽고 글 쓰면서 살자고. 남들은 잘 이해를 못했다. 너무 빨리 은퇴하려는 게으른 학자로 보거나, 돈도 안 될 땅에 헛돈을 쓴다며 혀를 찼다. 남들이 뭐라고 하건, 그는 홍천강변에서 낮에는 농사 짓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부지런히 여러 권의 책과 논문을 썼다.
홍천강이 뱀처럼 굽이도는 춘천시 남산면 산수리, 산 첩첩 논골마을의 작은오리나무구렁골에 그의 집이 숨어 있다. TV가 안 나오고 라디오는 지직거리고, 2년 전 신작로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차가 닿지 않던 오지다. 개발될 가능성이 없는 곳을 찾아 굳이 궁벽진 골짜기를 택했다. 처음 9년 동안은 전화도 놓지 않고 지냈다.
은 그의 농사일기다. 구입한 집과 농지를 처음으로 자세히 살펴본 1990년 4월 21일 일기부터 메주 쑨 냄새가 집안에 진동하자 봄이 오면 추녀 밑에 매달아야겠다고 쓴 2009년 12월 18일치까지 묶었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 동안 농사를 지으며 자연과 더불어 산 생생한 기록이다. 자연과 땅의 가르침, 소박한 삶에 대한 성찰, 무분별한 개발을 일삼는 문명에 대한 비판이 맑고 담담한 문장에 오롯이 담겼다.
그의 농사와 시골살이는 도시인의 주말 취미나 낭만적인 전원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다 쓰러져 가는 집을 구해 수리하는 것부터가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 등짐으로 먼 길을 오가며 자재와 세간을 날라야 했다. 농사는 도시 사람이라고 경계하는 이웃 주민들에게 몸을 낮추어 하나하나 배웠다. 땡볕에 쪼그리고 앉아 김을 매고, 벌에 쏘여 고생하고, 다치면 병원이 멀어 애를 먹었다. 도둑이 들어 현판을 훔쳐간 일도 있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그는 농사도 예술이고 수신(修身)임을 깨닫는다. 노동의 신성함 또한 온몸으로 느낀다.
땅과 자연은 더불어 사는 삶을 가르쳐줬다. 폭우와 폭설 등 자연의 위력은 두려움과 겸손을 깨우치게 했다. 농약을 안 친 덕분에 그의 집 마당과 논밭은 온갖 곤충과 새와 동물들의 피난처가 됐다. 봄이면 뻐꾸기 소리에 잠을 깨고, 눈 내린 한겨울 보름달 아래 밤새 꽥꽥대는 오리 떼 소리와 더불어 책을 읽고, 여름날 지붕을 두드리는 세찬 빗줄기를 들으면서 그는 몸으로 자연을 받아들였다. 삽으로 땅을 파헤치다가 개구리 두더쥐가 줄줄이 기어나오자 그 놈들 다칠세라 호미로 살살 하고, 연못가에서 밀애를 즐기던 새 한 쌍이 인기척이 놀라서 날아가는 것을 본 뒤로는 발걸음도 조심하는 모습은 말로만 떠드는 자연 사랑이 결코 미치지 못할 바이다.
이러한 자세는 자연스럽게 문명과 세태 비판으로 이어진다. 봄 가뭄에 농부들 속 타는 줄도 모르고 날씨가 좋다며 주말 나들이를 권하는 기상캐스터 얼굴에 먹을 발라주고 싶다고 분통을 터뜨리고, 한창 바쁜 농사철 강변 행락객의 소음과 쓰레기에 화를 내기도 한다.
저자는 인간의 탐욕과 개발 바람에 파괴되는 자연과 농촌을 걱정하는 글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조물주가 수천만 년 동안 다듬어온 부드러운 구릉과 강변의 아름다운 굴곡을 중장비를 동원해 단 며칠 만에 망가뜨리는 인간의 행태를 고발하면서“국토의 난개발은 재앙을 부를 뿐”이라고 비판한다.
정년 퇴임 이듬해인 2008년, 그는 주민등록까지 이곳으로 옮겼다. 스스로는 “아직 50점 짜리 농사꾼밖에 안 된다”고 말하지만, 이제 진짜 농사꾼 진짜 시골 사람이 된 것이다. 경작 면적도 세 배로 늘려 더 많은 시간을 들에서 보낸다. “기력이 다할 때까지 땅과 함께 하며 하루하루 진정한 촌사람으로 변해가겠다”는 것이 그의 다짐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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