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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리치 스토리] 기업사냥꾼인가 행동주의 투자자인가, 칼 아이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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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리치 스토리] 기업사냥꾼인가 행동주의 투자자인가, 칼 아이칸

입력
2010.07.30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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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스트리트에서 친구를 원한다면 차라리 개나 한 마리 사라.”

2006년 KT&G의 경영권을 위협하며 인삼공사 매각과 자산 처분 등을 요구한 ‘KT&G 습격사건’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기업사냥꾼 칼 아이칸(74)이 자주 쓰는 말이다. 농담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월가 그리고 아이칸 자신의 냉혹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난해 말에는 절친으로 알려졌던 미국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와 대결을 벌여 ‘돈 앞에서는 친구가 없다’는 그의 철학을 보여줬다. 트럼프는 애틀랜틱시티 카지노 인수에 아이칸이 뛰어들어 방해하자 “부인과 이혼할 때 내게 상담까지 했던 아이칸에게 실망했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아이칸은 이렇게 되받아 쳤다. “우리는 친구가 아니다. 나는 트럼프 딸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했을 때도 놀라지 않았다.”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상어

유대인인 아이칸은 미국 뉴욕의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변호사)와 어머니(교사)는 부(富) 축적에 관심이 없었지만 당시 성공한 비즈니스맨이었던 삼촌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프린스턴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뉴욕대 의과대학을 중퇴하고 1961년 월가에 취업했다. 증권사 견습생이었던 아이칸은 68년 빌린 돈 40만 달러로 자신의 증권사를 차렸고, 이후 정크본드(신용등급이 낮은 기업이 발행하는 고위험ㆍ고수익 채권) 투자로 억만장자가 된다.

아이칸이 세상에 이름을 알린 건 85년 항공사 트랜스월드에어라인(TWA)을 인수하면서부터. 아이칸은 TWA 노조와의 임금 협상에서 합의가 임박할 때마다 협약 내용이나 숫자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또다시 바꿔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곤 했다.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노조를 가혹하게 다루기로 유명한 텍사스 항공의 프랭크 로렌조에게 회사를 팔아버리겠다고 한 것. 아이칸은 그런 식으로 원하는 것을 하나씩 관철시켰다.

그가 지금까지 인수했거나 인수 혹은 경영권 참여를 시도한 기업은 모두 20여개. RJR나비스코, UXS, 텍사코를 비롯 GM, 타임워너, 모토로라, 야후 등 내로라하는 기업들도 상당수다. 1년여 동안 아이칸의 집요한 공격을 받은 모토로라 경영진은 결국 2008년 휴대폰 사업을 분리하고 아이칸측에 이사회 의석 두 자리를 배정하며 무릎을 꿇었다. 야후 창업자 제리 양도 아이칸의 축출 선언 이후 4개월여 만에 경영 악화 등이 겹치며 최고경영자(CEO)자리에서 물러났다.

아이칸은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닥치는 대로 공략했고 한 번 눈독을 들이면 끝장을 봤다. 상어라는 별명을 얻은 이유다. 독특한 협상 스타일로도 유명하다. 매수 협상 전날에는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당일에는 낮잠까지 자는 것으로 알려졌다. TWA 인수 때도 밤 9시에 시작하기로 한 협상장에 11시에 나타났다. 집에서 잠을 자고 말끔히 샤워까지 하고 온 아이칸은 이미 녹초가 된 사람들을 상대로 협상을 완고하게 끌고 갔다.

엇갈리는 평가

정작 아이칸은 ‘기업사냥꾼’이라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행동주의 투자자로 불리기 원한다. 행동주의 투자자란 이사회 장악 등 경영에 개입해 적극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주주. 아이칸은 늘 CEO들의 무능함과 높은 연봉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경영권 참여와 인수를 통해 저평가된 기업의 가치를 끌어 올리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실제 일부 언론과 소액주주들은 아이칸이 기업의 투명성과 주주가치를 높이는 데 일조한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칸을 바라보는 시선은 대체로 차갑다. 그는 이사회 의석을 확보한 후 배당이나 주식 재매각, 합병, 부실사업부문 매각 등으로 기업 가치를 단기간에 끌어 올리지만, 차익 실현 후에는 매정하게 떠나기 때문.

포이즌필(적대적 M&A를 막기 위해 기존 주주에게 시가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지분 매입권리를 주는 제도)을 개발한 기업법 전문 변호사 마틴 립튼은 “기업들이 장기적 성장 대신 단기 성과를 내도록 압력을 가하는 대표적 인물이 아이칸”이라고 비판했다. 아이칸은 국내에서도 KT&G 경영참여를 선언한 지 10개월만에 1,500억원 가량의 차익을 내고 지분을 모두 팔아 ‘먹튀’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그의 경영진 교체가 항상 성공적인 것도 아니었다. TWA는 아이칸의 인수 후 부채가 3배나 급증했고, 비디오 대여 체인업체 블록버스터는 주가가 반토막 났었다.

통 큰 기부왕

탐욕적 이미지와는 언뜻 어울리지 않지만, 아이칸은 기부왕이다. 뉴욕시의 종합경기장 '아이칸 스타디움'은 그가 1,000만 달러를 기부해 지은 경기장으로 개인이 뉴욕의 공원 시설에 기부한 것 중 최고액이다. 프린스턴대에 자신의 이름을 딴 실험실이 있을 정도로 모교에도 상당액을 기부했고, 미혼모와 노숙인을 위한 보호시설도 그의 기부를 받아 운영 중이다. 2001년에는 스타라이트 어린이재단의 올해의 수호천사에 선정되는 등 기부 관련 상도 여러 개 받았다.

요즘 그의 근황은 어떨까. 외신에 따르면 아이칸은 올 초 헐리우드의 대표적인 영화사 라이온스게이트엔터테인먼트를 공개 매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1차 시도에서는 실패했으나, 여전히 끈질기게 매달리고 있다. 그의 사냥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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