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팔순을 맞은 소설가 박완서(사진)씨가 산문집 (현대문학 발행)를 냈다. 산문집으로는 (2007) 이후 3년 여 만이다. 이번 책엔 박씨가 주로 2008년 이후 월간 ‘현대문학’ 등에 발표한 에세이 13편과 재작년 한 신문에 연재한 서평들, 생전 박씨와 인연을 맺었던 김수환 추기경, 소설가 박경리씨, 박수근 화백을 추모하는 글이 실렸다.
여덟 살 이후 줄곧 살아온 서울을 떠나 10여 년 째 경기 구리시 교외의 자택에서 살고 있는 박씨는 앞뜰 잔디밭을 가꾸는 일을 낙으로 삼고 있는 평온한 일상을 에세이를 통해 전한다. “잔디밭에 등을 대고 누우면 부드럽고 편안하고 흙 속 저 깊은 곳에서 뭔가가 꼼지락대는 것 같은 탄력이 느껴진다. 씨를 품은 흙의 기척은 부드럽고 따숩다. 내 몸이 그 안으로 스밀 생각을 하면 죽음조차 무섭지 않아진다.”(15쪽) 손톱 밑에 낀 흙에서 싹이 돋아서 “푸른 싹이 난 열 손가락을 하늘 향해 높이 쳐들고 도심의 번화가를 활보하는” 자신을 떠올려보는 노작가의 상상력이 유쾌하다.
마흔 살 늦깎이로 등단한 지 올해로 40년을 맞은 박씨는 자신의 문학적 원체험이라 할 수 있는 6ㆍ25전쟁에 대한 기억과 감상을 여러 편의 글에서 밝힌다. 소설가 김훈씨의 장편 에 대한 독후감을 실마리로 삼은 에세이에서 박씨는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 묘사된 당시의 추위로부터 처녀 적 겪은 1ㆍ4후퇴를 떠올린다. 가장 노릇을 하던 오빠가 다리에 총상을 입으면서 옴짝달싹 못하게 된 박씨의 여섯 식구가 겪은 고초는 혹한으로 인해 박씨의 기억에 더욱 깊게 새겨졌다. “그 겨울의 추위가 냉동보관시킨 기억은 마치 장구한 세월을 냉동보관된 식품처럼 썩은 것보다 더 기분 나쁜 신선도를 유지하고 있으니 이건 기억이 아니라 차라리 질병이다.”(65쪽)
소설을 쓰기보단 학문을 하고 싶었던 소싯적의 꿈은 노작가에게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25쪽)는 회한을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대목을 만나면 역시나, 그가 늘 정신의 탄력을 팽팽히 유지하려는 ‘영원한 현역’임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작가로서의 나의 새로운 다짐이 있다면 남의 책에 밑줄을 절대로 안치는 버릇부터 고쳐볼 생각이다. 내 정신상태 내지는 지적 수준을 남이 넘겨짚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도 일종의 잘난 척, 그런 내가 정떨어진다. 자신이 싫어하는 나를 누가 좋아해주겠는가.”(155쪽)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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