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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신군부에 맞선 장태완씨 빈소 추모 발길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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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신군부에 맞선 장태완씨 빈소 추모 발길 이어져

입력
2010.07.27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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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의로운 참 군인이었습니다.”

27일, 고 장태완 전 국회의원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는 종일 조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조문 화환을 보냈고, 제5공화국 핵심 인사인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도 영정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이수성 전 국무총리, 박세환 재향군인회 회장 등도 조문하며, ‘참 군인’으로서의 생애를 추모하고 마지막 길을 외롭지 않게 지켰다.

1979년 12∙12사태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던 시절 등 30년 가까이 고인의 곁을 지켰던 김수탁 전 수경사령관 비서실장은 “50년 육군종합학교 12기로 입학해 선배들과 동기생을 통틀어 최초로 장군에 진급했고, 12∙12사태 때 신군부 세력에 맞서며 군인 정신과 정의를 지켰던 군인”이라며 회고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이북에서 내려오는 탱크를 막기 위해 협곡을 만들고 돌을 떨어트려 탱크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처음으로 고안할 정도로 전술에 능했고, 이후 12∙12사태 때 신군부의 끈질긴 설득에도 단 한 번도 굴하지 않았던 기개를 지녔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12∙12 당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주축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직속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대통령 재가 없이 강제 연행했다는 소식을 듣고 청와대에 구출대를 보내고 한강교량 등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는 등 쿠데타 세력에 맞섰다. 고인은 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예편됐다.

이후 가족들의 불행도 잇따랐다. 고인의 부친은 아들의 강제 예편 소식에 충격을 받아 직후 숨을 거뒀고, 1982년 서울대 자연대에 재학 중이었던 외아들 성호(당시20세)씨가 낙동강 근처 산기슭에서 음독 자살하기도 했다. 당시 시신을 못 찾아 애태우던 고인에게 신군부는 시신을 찾아줄 테니 한국증권전산 사장 직을 맡으라고 회유했다고 측근들은 전했다. 고인은 무려 한 달여 만에 찾아낸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나 때문에 이렇게 됐어. 좀 더 따뜻하게 아들을 감싸 안아줘야 했다”며 뜨거운 부성애를 보였다고 지인들은 회고했다.

고인의 평소 삶도 올곧았다. 김 전 비서실장은 “최근까지 고무줄 속옷이 아닌 끈으로 묶는 속옷을 입었고, 본인 생일 때면 으레 들어오는 선물들도 모두 거절했다”며 “사단장으로 재임할 당시 부하가 3,000원짜리 내의를 사온 것도 돌려주며 ‘정성은 알겠으나 예외를 둘 순 없다’고 못박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사위 박용찬씨는 “평소 말씀은 많이 하시지 않았지만, 가족들에게 정의로운 삶에 대해 늘 강조하셨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1982년 한국증권전산(현 코스콤) 사장, 회장을 역임했고, 1994년 재향군인회 27,28대 회장을 거치며 향군묘역사업 등 군인복지사업에 앞장섰다. 2000년 3월 민주당에 입당해 16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 국회 보훈특보를 지내며 제대군인을 위한 보훈정책 마련에도 힘을 쏟았다.

유족으로는 부인인 이병호씨와 딸 현리씨, 사위 박용찬(인터젠 대표)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발인은 29일 오전8시30분. (02)3010-2000

강지원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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