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구-죽음의 형식’을 쓰게 된 동기는 연출가 채윤일 형의 재촉 때문이었습니다. 채윤일 형을 처음 만난 것은 1987년 7월 부산 가마골소극장에서였지요. 누구 마음대로 이현화작 ‘산씻김’을 공연하느냐고 항의 방문을 온 것입니다. 저는 작가의 허락을 받았다고 했는데도 “이현화 희곡은 채윤일이 공연한다”는 것이 한국 연극의 불문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내가 연출해야 할 작품 한 편을 허락도 없이 가져갔으니 당신이 한편 써 달라”는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희곡을 씁니까? 그랬더니, 당신도 작가 아니냐는 것이지요. 채윤일 형은 제가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란 시나리오를 써서 대종상 각본상을 수상한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낯선 선배 연출가의 막무가내식 요구가 싫지 않았습니다. 그의 억지 속에 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써 드린 제 첫 희곡이 ‘시민K’ 였습니다. 그러나 채윤일 형은 “이 작품은 당신이 직접 연출하는 것이 좋겠다. 다른 걸 써 달라”고 퇴짜를 놓았습니다. 만일 퇴짜를 놓지 않았다면 저의 출세작 ‘시민K’는 세상에 선을 보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채윤일 형이 퇴짜를 놓아준 덕분에 제가 직접 연출한 ‘시민K’가 연희단거리패의 두 번째 서울 나들이 공연을 하게 된 것이지요.
대신 써 드린 희곡이 ‘오구-죽음의 형식’이었습니다. ‘시민K’ 앵콜 공연 중이던 89년 6월 임시로 세 들어 합숙생활을 하던 서울 창동 주공 아파트에서 6월 28일 저녁 대본을 쓰기 시작하여 6월 30일 정오 무렵에 탈고 되었습니다. 이틀만에 ‘오구-죽음의 형식’을 쓴 셈인데 거의 신들린 글쓰기였습니다. 책상 위에는 김석출 선생이 기장에서 사고무친의 마을 할머니를 위하여 판을 벌였던 산오구 굿 녹취 자료 하나가 달랑 놓였습니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이틀 동안 공병우 타자기를 두들겼습니다. 어디서 하루 종일 무전기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는 신고가 들어와서 경찰이 다녀갔고, 옆방에 얹혀 살던 엄승화 시인이 보다 못해 우유와 구운 토스트를 가지고 제 방에 들어오다가 혼비백산하여 쓰러졌습니다. 엄승화 시인의 말에 의하면 거무튀튀한 괴물이 발가벗은 채 타자기를 두들기다가 돌아 보더라는 것입니다. 눈알이 빨갛게 불타고 있더랍니다. 그때 저는 팬티 한 장 걸치지 않고 글을 써 내려간 것이지요. 온몸에 열꽃이 돋아서 종이 한 장이라도 제 몸에 스치면 불타 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탈고된 ‘오구-죽음의 형식’은 6월 30일 오후 서울연극제 대본 심사 작품으로 접수되었습니다.
89년 가을 서울연극제 공식참가 작품으로 ‘오구-죽음의 형식’(이윤택 작 채윤일 연출 극단 쎄실 공연)이 초연되었습니다. 연습 도중 채윤일 형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제가 이틀 동안 연습을 도왔습니다. 문제는 굿판이었습니다. 채윤일 형은 굿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석출 역을 맡은 목화 출신 배우 김응수와 저 둘이서 굿 사설을 작곡하다시피 했고, 춤도 제가 직접 실연을 하며 가르쳤습나다. 연극은 거의 사실극적 분위기였습니다. 리듬감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한 장면 한 장면 사실적인 연기로 이어가는 공연이었지요. 저는 나름대로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맏상주 역을 맡았던 김동수 형이 동아연극상 남자 연기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채윤일 형은 이 작품도 되돌려 주겠으니 또 다른 희곡을 써 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희곡을 써 주고 ‘오구’는 제가 직접 연희단거리패 배우들을 데리고 다시 만들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자신이 서울 공연을 기획해주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저는 이 제안을 옳다구나 하고 받아 들였습니다. 대신 써 드린 희곡이 ‘혀’였고, 저는 이듬해 6월 이윤택 작 연출 연희단거리패 제작 ‘오구-죽음의 형식’을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막 올리게 됩니다. 저의 세 번째 서울 나들이 공연이었고, 바로 대박이 터졌습니다. 관객의 행렬은 문예회관 소극장 입구에서 대극장을 휘돌아 바탕골소극장까지 이어졌습니다. 2주 동안 공연이었는데 객석 100석 규모의 소극장에 300명 넘게 입장했더랬지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 어린아이 관객들이 몰려 들었고, 극장 안은 웃음 바다였습니다. 당시 KBS-TV 퀴즈 프로에 ‘오구-죽음의 형식’이 등장했고, 당대 최고의 앵커우먼 신은경씨가 어머니와 함께 구경을 오기도 했습니다. 노란 원피스를 입고 객석에 앉은 신은경씨 때문에 그날 공연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관객들은 공연에 집중하는데 정적 부산에서 상경한 배우들은 객석의 신은경씨를 보느라 계속 대사를 놓치고 무대 동선을 무너뜨렸습니다. 배우들이 신은경씨가 잘 보이는 곳으로 다가가고 서로 밀쳐내는 해프닝이 연출된 것이지요.
다른 한편 ‘오구-죽음의 형식’은 기존 연극계의 실망과 힐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백성희 선생과 국립극단 중견배우들은 공연을 보던 도중 퇴장했습니다. 중앙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라는 여학생 둘은 “이건 이윤택의 작품이 아니다”며 퇴장하다가 저와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 희곡을 서울연극제 공연작으로 뽑으셨던 차범석 선생의 실망이 가장 컸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무대에서 저렇게 장난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이윽고 원로 연극평론가 이상일 선생의 리뷰가 조선일보에 게재됩니다. 유망한 젊은 극작 연출가들이 전통을 함부로 해체하면서 경박하게 무대를 만들고 있다는 혹독한 비판이었습니다. 비판의 대상이 된 두 작품은 김명곤 작 연출 ‘점아 점아 콩점아’와 ‘오구-죽음의 형식’이었습니다. 여기서 비판의 대상이 된 김명곤 형과 저는 각기 따로 반격에 나서고, 그 이후 여섯 차례에 걸쳐 굿과 연극 논쟁이 펼쳐집니다. 실로 오랜만에 연극 논쟁이 신문과 한국연극 등 잡지를 통해 전개되었고, 그 논쟁이야말로 원로 세대와 새로운 연극 세대간의 격돌이었고, 전통과 동시대에 대한 생산적인 충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오구-죽음의 형식’은 90동경 국제연극제와 91 독일 세계연극제에 한국대표 연극으로 참가하게 됩니다. 오타 쇼고씨가 예술감독을 맡은 동경국제연극제는 프로듀서 모리지리씨가 문예회관 소극장 공연 당시 마지막 장면에 관 속에 꽃을 던지는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독일에서 온 예술감독 리버만은 “한국 연극은 일본 연극의 변방이라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 작품을 보니 한국 연극은 분명 일본 연극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는 코멘트를 합니다. 연극평론가 구희서 선생은 이 코멘트를 놓치지 않고 신문에 게재하면서 ‘오구-죽음의 형식’에 손을 들어 준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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