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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붓 길, 역사의 길'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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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붓 길, 역사의 길' 특별전

입력
2010.07.27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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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는 그 시대와 사회를 담는다.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한국 근ㆍ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의 글씨를 통해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 건국에 이르는 굴절된 역사를 살펴보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 지난 23일 개막, 8월31일까지 여는 ‘붓 길, 역사의 길’ 특별전이다.

쇄국과 개화로 맞섰던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로부터 해방정국에서 남북공동정부 수립과 남한단독정부 수립으로 반대 입장에 섰던 김구와 이승만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이끈 주역들의 글씨를 100여 점 모아 전시한다.

‘정헌(正軒)’. 1907년 고종이 아들 순종에게 양위를 하면서 내려준 호다.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이준 열사를 파견한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일제의 압력을 받아 퇴위하게 됐지만 고종의 글씨는 흐트러짐이 없이 반듯하기만 하다. 고종은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만방(萬邦)의 모범이 되라’하였다. 임금이 바르면 바르지 않음이 없으니, 이제 ‘정(正)’으로 호를 내려 주어 힘쓰라는 뜻을 붙인다”고 썼다.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던 당시 고종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망국의 실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필묵은 이토 히로부미의 칠언시(七言詩)에 친일에 앞장섰던 김윤식, 조중응, 박제순 등이 덧붙인 차운시(次韻詩)이다.

조선통감 사임 후 귀국을 앞둔 1908년 이토 히로부미는 이 시에서 “뭇 사람들과 헤어지자니 더욱 더 아쉬워/고운 얼굴에 흰 머리는 바로 신선들이다/교린(交隣)의 기월이 맹단(盟壇)에 남아있으니/양국에 화기(和氣)가 오랫동안 맴돌리라”라고 썼다.

이에 김윤식은 “흰 구름, 푸른 소나무 경계가 고요하니 /이곳에서 신선을 만날 수 있으리라”,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 명인 조중응은 “태사(太師)의 치마며 신발이 신선을 닮으셨네/동풍에 돛을 달아 귀국하시고 나서도/큰 꿈이 이따금 우리나라에서 뒤척이시리라”, 박제순은 “세상에 우뚝 선 풍모는 스스로 탁월하셔서/물러나 쉬는 즐거운 곳에서 신선이 되시었네“라고 이토를 신선으로 비유한 시를 여백에 적어 넣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이 유물은 한일강제병합을 앞둔 당시 세상이 어떻게 굴러갔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을사조약 소식을 듣고 자결한 민영환의 유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뤼순 감옥에서 처형당하기 직전 안중근 의사가 자신을 취조한 일본인 검찰관에서 써준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라는 글씨(보물 제569-22호) 등 애국지사의 필묵과 함께 친일파들의 글씨도 함께 전시된다.

이완용은 “피로써 이름을 다툼은 도리어 어리석으니/정성을 미루어 대중에 미쳤으니 무엇을 의심하랴/집집마다 신무(神武)는 천추의 사업이니/바로 공명을 이룰 때가 바로 이때라네”라는 칠언절구를 남겼다. 신무는 일본의 1대 천황이니, 조선이 일본화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전시에서는 또 당대 난초 그림의 쌍벽이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민영익의 그림을 볼 수 있고, 만해 한용운의 칠언 율시, 백범 김구의 ‘헌신조국(獻身祖國)’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민위방본(民爲邦本)’을 함께 볼 수 있다.

전시는 쇄국과 개항, 개화와 척사, 매국과 순절, 친일과 항일, 남북공동정부 수립과 남한단독정부 수립 등으로 구성됐다.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과거에는 애국지사와 친일파의 글씨를 함께 전시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면서 “서로 상반되는 길을 걸은 인물들의 글씨를 함께 볼 수 있다는 것이 이번 전시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남경욱기자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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