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지 넉 달만인 1910년 12월. 등에 짐을 메고 머리에 보따리를 인 60여명의 남녀노소가 서울을 떠나 압록강으로 향했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던 1905년부터 망국을 예상하고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을 계획한 우당 이회영(1867~1932)과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을 지낸 이시영(1868~1953) 등 6형제 일가의 만주 망명행렬이었다.
한일강제병합, 이회영 일가의 만주망명, 일본의 반전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인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ㆍ1871~1911)의 천황 암살기도사건 100년의 의미를 동시에 조명하는 국제 학술대회가 열렸다. 국내 아나키즘 연구모임인 한국자유공동체연구회 주최로 24일 오후 서울 우당기념관에서 열린 ‘제6차 한일 자유공동체연구자 공동워크숍’에서다. 일본에서도 ‘가네코 후미코 연구모임’ 회원 등 아나키즘 연구자들이 참석했다.
이문창 국민문화연구소 명예회장은 이회영 일가의 만주망명 100년의 의미에 대해 “나라가 망하자 끝났다고 절망한 것이 아니라 롤백(roll backㆍ재진입)을 위한 혁명 기지를 국경밖에 건설하자는 웅대한 시작의 뜻을 품었던 계획”이라고 평가했다. 그는“우당은 독립운동의 목적이 민족의 해방과 자유의 탈환을 통해 자유평등의 복지사회를 실현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수단으로 자유합의, 자유연합적 이론에 근거한 조직을 추구했다”며 “감투싸움과 파벌싸움을 예상하고 임시정부의 활동에 회의적이었던 우당은 아나키스트 위주의 독립운동 조직을 한중일 항일공동 전선으로 확대 발전시키는 것을 운동의 최종목표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가메다 히로시(龜田博) 전 도시샤대 인문연구원은 고토쿠 슈스이 등 20세기 초 일본 아나키스트들의 대두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무력개입과의 연관성을 설명했다. 그는 “이들의 반전사상은 갑오농민전쟁부터 본격화된 조선에 대한 일본의 무력개입이라는 시대적 배경 아래 잉태됐다”며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때 고토쿠 슈스이가 안 의사의 행위를 칭송하는 한시를 남긴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천황제 폐지를 기치로 내걸었던 고토큐 슈스이와 그의 동료들은 당시 천황이던 무쓰히토의 암살을 꾀하다가 1910년 소위 대역죄로 체포돼 이듬해 1월 사형됐다.
가쓰무라 마코토(勝村誠) 리쓰메이칸대 교수는 한일강제병합 100년과 관련된 일본 학계의 최근 동향을 소개했다. 그는 “일본 학계에서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돌이켜보고 역사책임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움직임이 착실히 진행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사회적으로 폭넓게 전개되는 정도는 아니다”라며“한국의 근현대사 연구성과를 잘 수용하고 국제적 학술교류를 진행하는 것이 일본정치사 연구의 과제”라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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