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가 국가 제도가 된 것은 18~19세기 근대 민족국가의 산물이다. 그 이전까지는 이를 테면 신(神)의 군대, 제왕의 군대였다. 현대적 국가의 군대, 국민의 군대는 나폴레옹이 국민개병(皆兵) 징병제를 도입한 것이 계기가 됐다.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프랑스는 국가가 민족보다 먼저 형성됐다”고 규정했다. 징병제와 프랑스어 공교육이 국가 정체성 형성을 촉진했다는 논리다. 군은 그렇게 국가와 민족, 국민과 떼놓을 수 없는 존재다.
EBS 강사 망발과 ‘예능’세태
EBS 수능 강사가“군대는 죽이는 것을 배우는 곳”이라고 떠든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난리다. 스타 강사라는 이 국어 선생은 인터넷 강의에서 군대 갔다 온 남자들이 나쁜 말을 쓰는 이유를 그리 설명했다. 언뜻 군의 고유한 역할과 부정적 영향을 그렇게 간명하게 비유할 수 있겠다 싶다.
그러나 “죽이는 거 배워오면서 뭘 잘했다는 거죠, 뭘 지키겠다는 거죠, 그거 안 배웠으면 세상이 평화로워요”라고 웃으며 떠들었다니 황당하다. 군대 비하(卑下)를 넘어, 군 복무와 국가 안보와 평화를 이렇게 도착(倒錯)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놀랄 정도다. 군에 안 간 여성이라는 편견을 경계할 겨를도 없이, 가치관이나 사고 방식의 혼돈을 의심하게 한다.
더 솔직히 말하면, 이래저래 사악한 느낌이다. 방송이든 어디든 요상한 말장난으로 인기와 돈을 버는‘예능인’이 행세하는 세태를 상징하는 듯하다. 군인과 민간인을 차별하던 세상이 연예인과 민간인을 나누는가 싶더니, 보통 연예인과 예능 프로그램에서 뜨는 예능인을 구분한다. 한때 전교조 활동을 했다는 그는 이런 세태에 영악하게 적응한 이로 짐작한다.
그의 전교조 이력을 굳이 시비할 건 아니다. 그보다 인기 강사로 입신해 전교조가 혐오하는 사립고에 영입되고, 그 뒤에도 공영 교육방송에서 짐짓 삐딱한 진보로 행세해 출세한 구조적 내력에 주목한다. 그는‘진보 상업주의’가 아니라, 그냥 천박한 상업주의를 열심히 좇았다. 그러나 진보와 상업주의의 동행을 자연스럽게 여긴 듯한 EBS 제작진이 뒤늦게 검증 소홀 따 위를 변명하는 것은 비겁하다.
이 30대 여교사는 민주와 자유와 평화 등을 진보의 독점적 가치인양 내세워 세속적 성공의 밑천으로 삼는 이들을 천박한 모양으로 대표한다. 그는 고작 EBS의 비호에 힘입어 고교생을 상대로 장난질 쳤지만, 그보다 더 넓은 세상에서 민주 평화 민족 등의 고상한 가치를 앞세워 마냥 정당한 척하며 정작 세속적 이익을 다투는 이들이 많다. 그게 우리 사회가 바닥 모를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는 남남갈등의 근본이라고 본다.
그 연유는 복잡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군대의 역할 등 국가의 본질을 망각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국익과 안보를 절대적 가치로 강요하는 국가주의, 안보 이데올로기 과잉에 시달렸다. 그렇다고 민주화 이후 20여 년, 진보 정권 10년의 경험에 도취해 국가와 안보를 민족과 평화의 하위개념으로 여기는 것은 착각이다. 개그 하듯 군과 정부를 비웃는 행태를 옹호하고 부추기는 것은 그야말로 나르시스적 환상이다.
국익의 으뜸은 국가 안보
국가의 존재이유와 국익의 으뜸은 국가 생존과 안보다. 세계화 시대에도 그게 여전히 국제관계의 중심이다. 지방선거 유권자들이 천안함 사태와 안보보다 무상급식과 4대강 등‘생활정치’를 먼저 고려했다는 분석은 이해한다. 대통령이 민생 돌보기에 나선 것도 흉볼 수 없다. 그러나 대북 정책 탓이든 안보 허점 탓이든, 젊은 군인 수십 명이 희생된 공격에도 조용히 넘어가는 게 민족과 평화를 위한 길인 양 외치는 것은 어설프다.
북한을 놓고‘적과 동포’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은 운명적이다. 하지만 북한과 미국과 중국 등이 모두 국가 생존과 국익을 위해 온갖 궁리를 하는 마당에, 우리만 물색 없이 민족과 평화를 되뇌는 것은 어리석다. 동포를 너그럽게 돌보려면, 먼저 국가와 국익을 단단히 지켜야 한다.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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