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말의 대통령 선거는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노무현 민주당 후보의 대결이었다. 투표일 직전까지 이회창 후보의 낙승이 예견되고 있었다. 이 무렵 내가 잘 아는 한나라당의 어떤 분이 찾아와 이 후보의 측근인 어떤 분과의 면담을 주선하겠으니 한번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그 동안 정권이 바뀌면 중앙은행 총재도 으레 바뀌어 왔기 때문에 그분은 내가 걱정이 되어 하는 말이었다.
이회창 후보는 나와 서로 아는 사이이며 내가 신뢰하고 존경하는 분이다. 그러나 나는 평생 정치에 줄을 댄 일이 없으며 더구나 정치로부터 초연해야 하는 중앙은행 총재로서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 정중히 사양하였다. 그런데 그 후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래서 나는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었지만 총재 재임 4년 중 3년은 노무현 대통령과 같이 일했다.
나는 한은 총재에 부임하면서 경제장관 회의에 나가지 않겠다고 공언한 일이 있다. 한국은행 업무와는 관련이 없는 안건들을 다루는 자리에 참석하는 한은 총재의 위상과 모양이 좋지 않고 실효도 없다는 것을 내가 건설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 별관 회의에는 빠짐없이 참여 했다. 이 회의는 노무현 정부가 출범해서 시작된 것이다. 매주 화요일 아침에 청와대 서쪽 별관에서 아침 식사를 같이 하면서 중요 현안들을 다루는 회의인데 정책조율에 매우 효과적인 회의였다. 그 당시 고정멤버는 대통령비서실 재정경제부 한국은행 금융감독위원회 등이었고 그때그때 현안에 따라 관련 부처가 참여했다.
이 무렵 잊히지 않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주재하는 청와대 회의이다. 노 대통령은 주요 경제현안에 대한 정책회의를 자주 저녁에 청와대 사저에서 주재했다. 나는 그 동안 이런 저런 공직을 겪으면서 많은 청와대 회의를 경험했지만 대통령 사저에서의 회의는 처음이었으며 또 그렇게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회의를 해보기도 처음이었다. 이 회의에서 주로 다루었던 문제들은 카드채 부실과 신용불량자 문제, 집값 안정문제, 경제 양극화와 빈부격차 문제 등이었고 주 참석대상자는 서 별관 회의와 비슷했다. 회의는 상의를 벗고(때에 따라서는 넥타이도 풀고)식사를 하며 농담도 주고받으며 진행했다. 그 때 노대통령은 담배를 태우고 있었는데 담배를 권하기도 했다.
어느 날 카드채 관련 회의가 사저에서 있었는데 그 날 노무현 대통령다운 일화 하나가 기억에 있다. 신용카드 회사들이 채권을 발행하여 그 돈으로 연리 20%내외의 고리대금을 하다가 돈을 빌려간 사람들이 돈을 못 갚게 되자 카드회사들이 부도위기에 몰리게 된 카드 채 사태가 2003년에 터진 것이다. 이 때 카드 회사들이 자금조달을 위해 발행한 채권이 100조원 내외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휴지화될 위험이 커지자 카드채에 투자한 은행 증권 보험 등 금융기관들이 줄줄이 부실화의 위험에 노출되고 민간소비가 위축되어 경기가 침체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대책회의에서 모든 참석자들과 나는 어떻게 하면 금융기관들의 부실화를 막고 금융시장의 안정을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데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대통령은 그것도 중요하지만 고리대금을 못 갚은 신용불량자들과 가계부채 문제가 더 중요하다 하면서 이에 대한 대책도 세우도록 주문했다. 그래서 그 때 카드대출 금리의 인하대책, 신용불량자 대책 그리고 신용회복위원회의 발족 등이 대안으로서 결정되었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늘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억울한 사람에 대해 배려했으며 정책수립에 있어서도 서민대중 위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의 재임 중 실제 혜택을 본 계층은 역설적으로 부유층이었으며 서민대중의 삶은 더 어려워지고 빈부격차는 더 커졌다. 말하자면 그는 배를 서쪽으로 저어갔는데 역풍으로 인해 실제 배는 동쪽으로 가버린 것이다. 이것을 ‘노무현의 역설’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역설은 부동산가격 폭등이 한 원인이었지만 더 큰 원인은 경쟁우위 부문과 경쟁열위 부문 간의 이른바 양극화현상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대기업과 수출은 잘되어 경제는 재임 5년간 연평균 4.4%씩 성장했지만 중소기업 자영업 농업은 위축되고 실업자는 늘어나고 빈부격차는 커져서 서민들 먹고 살기는 더 어려워지게 된 것이다.
이 문제로 노심초사한 노무현 대통령은 양극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여러 차례 청와대 대책회의를 열기도 했고 온갖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지만 묘안이 없었다. 양극화 현상은 경쟁력이 강한 자만 살아남는 세계화 개방질서와 저임금 중국의 부상으로 인한 중소기업 자영업 농업 등 저생산성 산업의 도산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세계경제질서와 관련된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로서 정책적 노력만으로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노무현 정권은 결국 이‘노무현의 역설’ 때문에 국민의 지지를 잃게 되었던 것이며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되풀이 될 개연성이 크다. 양극화 현상과 고용 없는 성장은 하나의 문제이며 아직도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다. 이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한 채 2009년 5월 고인이 된 노무현 대통령의 명복을 비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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