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이라던 제구력으로, 프로야구를 호령했던 투수가 있었다. 자로 잰 듯한 그의 공 끝 하나에 야구팬들은 전율을 느꼈고, 만 40세까지 현역 생활을 지속한 원동력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에도 유니폼을 말끔히 차려 입은 남자는 우산을 받쳐 들고, 마중을 나왔다. 등 번호 41번은 없었지만, LG 팬들의 추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는 ‘노송’김용수(50) 중앙대 감독. 1985년 MBC 청룡에 입단해 근 25년을 한 팀에서만 선수, 코치로 지내다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김 감독을 23일 중앙대 안성캠퍼스에서 만났다.
미련없는 선택, 후회없는 새 삶
지난해 말 LG 스카우트 코치로 발령을 받고, 대체 외국인선수 물색을 위해 미국에 머물던 지난 4월26일. 김 감독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중앙대에서 이력서를 내 보라고 하길래 많은 고민을 하다가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내게 됐죠.” 그리고 5월4일. 중앙대의 새 사령탑으로 확정됐다는 통보가 전해졌다.(본보 5월13일 보도) “다시 프로무대에 돌아간다는 기약은 없지만, 유니폼을 입고 모교 후배들과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초보 감독’의 성적은 어떨까. 부임 후 첫 대회였던 하계리그에서 5전 전패로 쓴 잔을 들이켰다. 대통령기에서는 1회전에서 탈락하는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아마추어지만 감독과 코치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전체 그림을 그려야 하는 감독 일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구단들이여, 눈높이를 낮춰라
김 감독이 아마추어 무대로 옮기고 나서 가장 뼈저리게 느낀 점은 프로에서 신인 선수들에 대한 기대치를 낮춰야 한다는 것. “저도 스카우트를 해 봤지만, 직접 와서 보니 선수 자원이 예전만 못합니다. 기본기에 충실하지 않고, 성적내기에 급급한 결과라고 봐야죠.”
김 감독이 부임한 이후 바꿔 놓은 규율이 있다. 무조건 오전에는 일반 학생들과 어울려 강의에 참여하도록 한 것. “학생들과 만나서 대화도 나누고, 강의를 대충이라도 들어 놓으면 사회에 나갔을 때 도움이 되더라고요.” 중앙대 79학번인 김 감독이 4학년이던 82년, 중앙대 야구부는 흑석동 본교에서 이곳 안성캠퍼스로 이전했다.“그 때는 펜스도 벽돌로 쌓아서 만들었고, 운동장 옆에 텐트를 치고 자기도 했죠.” 28년 만에 돌아온, 땀과 추억이 서려 있는 곳에서 김 감독은 후배들과 함께 미래를 만들고 있었다.
프로에서 못 다한 꿈
LG 2군 투수코치로 있던 지난해 김 감독은 구단의 부름을 받고 1군 투수코치로 승격했다.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선수들 사이에서 명 조련사로 인기가 높았지만, 1군 ‘메인’코치는 지도자 생활 9년 만에 처음이라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 현실.
김 감독은 늘 LG의 차기 감독 후보 ‘0순위’로 꼽혔지만, 구단 고위층에선 후한 점수를 주지받않았다. 오히려 감독이 교체될 때마다 옷을 벗거나, 한직으로 내몰리면서 희생양 아닌 희생양이 됐다. “감독 그릇이 아니라는 둥, 대인 관계가 폭넓지 못하다는 둥 여러 얘기들이 있었죠. 말 그대로 들리는 말들이니 아니라고 부인하거나 변명할 상대도, 이유도 없었고요.”
그래도 마음의 고향
2군에 머물고 있는 투수 이재영이 최근 김 감독을 찾아왔다. 이동현과 심수창은 전화를 걸어 ‘원포인트 레슨’을 요청했다. 2군 코치로 머물면서 공을 들였던 투수들에게 김 감독은 아직도 최고의 스승이다.“2군에 오래 있다 보니, 선수들이 저를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무작정 받아주기보단 장단점을 파악해 선배로서, 코치로서 가르치는 게 우선이죠.”
신통치 않은 용병투수 더마트레에 대한 원망의 화살이 농담 반, 진담 반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도 알고 있다. “공은 괜찮지만, 한국에서 적응하는 게 관건이라고 분명히 구단에 얘기했죠, 결과를 가지고 따진다면 작년 도미니카 윈터리그 때 히메네스(두산)를 무조건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게 저였습니다.”
그래도 영원한 ‘마음의 고향’ LG를 향한 애정은 여전했다. “마운드만 조금 괜찮아지면, 후반기 충분히 4강에 도전해볼 만합니다. 전 떠났지만, 후배들을 위해 열심히 응원해야죠.”
안성=성환희기자 hhs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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