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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26) 손기정 신드롬으로 본 식민지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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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26) 손기정 신드롬으로 본 식민지 민족주의

입력
2010.07.26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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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가리게 했던 것은 30cm짜리 묘목이었다. 시상대에 선 손기정의 품에서 방패가 되고 위안이 돼 주었던 그 나무는 70여 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이제 고개를 젖혀야 온전히 보일 정도로 우람하게 자랐다. 서울역 뒤편 만리동 고개 중턱에 자리잡은 손기정 체육공원. 손기정이 히틀러로부터 올림픽 제패 부상으로 받았던 월계관수 묘목은 높이 10m 이상의 거목으로 성장해 시원한 그늘을 드리고 있다. 실제 수종(樹種)은 미국이 원산지인 대왕참나무다.

배드민턴장, 농구장 등의 시설을 갖춘 시민들의 체력단련장이자 휴식터인 손기정체육공원(2만9,600㎡규모)은 손기정의 모교인 양정고보(해방 후 양정고)가 있던 곳.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붉은 벽돌 교사(校舍) 3개동은 1988년 양정고가 목동으로 옮긴 후 주민도서관, 체력단련장 등으로 이용되고 있고 손기정이 공부했던 교실에는 단촐한 손기정기념실이 자리잡았다.

기념실 내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당시의 사진과 각종 신문자료 등엔 식민지 조선인들이 느꼈던 벅찬 환희와 눈물, 감동이 뒤섞여 있었다. 그 흥분의 무게, 그 충격의 여파야 당시에도 측정할 수 없었거니와 기록으로도 남을 수 없는 것들이지만 2002년 월드컵 4강의 뜨거운 경험 덕분에 지금 세대도 식민지 조선인들을 사로잡았던 강렬한 집단 카타르시스를 비슷하게나마 떠올릴 수 있게 됐다.

콤플렉스의 극복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당시 24세)이 올림픽 신기록(2시간 26분 42초)으로 금메달을 땄을 때, 전국 곳곳에서 조선인들이 거리로 몰려 나와 “손군 만세”를 외치고 신문들은 “인류최고의 승리, 영원 불멸의 성화” “우리 민족 최대의 영예” 등의 헤드라인으로 연일 대서특필했다. 당시 조선인의 심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심훈의 시(詩)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승전의 방울 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어잡고/ 전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 부를 테냐??’”(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 11일)

환희의 이면에는 바로 ‘한번도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식민지 조선인들을 지긋지긋하게 억눌렀던 열등감이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를 갓 알게 됐을 때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계 속에 없다는 현실은 ‘지지리도 못난 민족’이란 자기비하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공원 내 후관 건물에 자리잡은 손기정 기념재단의 자료보관실에는 그의 발도장이 걸려 있는데, 발 크기가 일반인과 다를 바 없다. 손기정의 외손자이자 기념재단 사무총장인 이준승씨는 “선생의 키는 168cm, 발 크기는 260cm 정도였다”고 말했다. 평범한 조선인의 신체지만, 그 이전까지 그 몸뚱이는 서구인들과 비교할 때 인종적 열등감의 대상이기도 했다. ‘조선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업혀 길러지고 꿇어앉는 습관이 있어 다리도 짧고 양복을 입어도 폼이 안 난다. 축구를 하면 다리도 길어지고 튼튼해져 민족적인 신체 결함을 고칠 수 있다’는 ‘개벽’의 기사(1920년 11월호)는 당시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열패감을 벗어제친 환희에 좌우가 따로 없었다. 당시 조선체육회 회장이었던 윤치호는 “조선 청년이 20억 인류를 이겼다”며 감격해 했고 김구도 “손기정 때문에 세 번 울었다”고 했다. 김일성도 손기정의 승전보를 듣고 크게 용기를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의 저자인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는 “일본인에 의해 주입되거나, 혹은 스스로 내면화시킨 민족적 열등의식을 치유하는데 스포츠만큼 효과적인 치료제는 없었다”고 말했다.

민족주의의 숨통, 스포츠

스포츠는 무기 없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제국주의 국가에게 스포츠는 우생학적 인종주의를 입증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유도하는 장이었다면, 조선인들에게도 나라 잃은 설움을 보상하고 후일을 기약하게 해주는 터전이었다. 윤치호 이상재 등이 모인 YMCA가 야구 축구 등 스포츠 보급에 힘을 쏟았던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손기정이 다닌 양정고보도 민족주의적 학교 체육의 산실이었다. 당시 국어교사는 언론인 출신 장지연이었고, 무교회주의를 제창한 진보적 지식인 김교신은 지리ㆍ박물학 교사이면서 농구부 지도교사였다.

양정고보는 육상, 정구, 농구, 럭비, 유도, 검도 등 여러 종류의 운동부를 육성했는데, 특히 두각을 보인 것이 육상이었다. 손기정에 앞서 김은배 선수가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마라톤에 참가해 6위를 기록, 올림픽이 더 이상 남의 잔치만은 아니라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에 이어 3위를 차지한 남승룡도 양정고보 출신이었다. 당시 양정고보 교무주임을 역임한 서봉훈 선생의 회고?왜 손기정이란 인물이 육상에서 나왔는지를 설명해준다. “농구나 럭비를 할 때는 일본인 심판들이 자기네가 불리하면 호각을 불어 반칙을 선언하고 조작도 하지만, 육상은 앞으로 뛰어나가면 많은 관중 앞에서 잡을 도리가 없거든. 그래서 양정이 육상을 장려했던 거야.”(‘양정 100년사’에서)

파시즘의 도구로 변질되는 스포츠

손기정은 우승하자마자 전남 나주의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 세 글자만 적었다. “슬푸다.”그의 우승은 조선인의 개가였지만, 일본인이란 멍에를 짊어져야 했던 심정을 대변하는 이 말은 그 뿐만 아니라 조선 스포츠의 앞날도 예고하는 말이었다. 일제는 조선의 영웅으로 떠오른 손기정이 귀국한 그 해 10월 8일 수많은 군중이 몰린 여의도 비행장에서 그를 빼돌려 남산의 조선신궁에 참배시키는 등 대중과 격리시키는 데 골몰했다. 이준승 사무총장은 “일제 경찰이 선생을 항상 감시하고, 주변인들을 괴롭혀서 결국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유학 갈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군부 파시즘 세력의 일본 정권 장악과 동아일보의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등이 겹치면서 일제의 식민 통치는 강경해졌고 1937년 중일 전쟁을 기점으로 전시동원체제가 들어서면서 스포츠도 군사훈련과 결합됐다. 학생들은 ‘무사 정신’을 고취한다는 명목으로 학교에서 황국신민체조나 교련조회를 해야만 했다. 1943년에는 모든 구기종목 경기가 중단됐다.

광복 후 손기정은 차츰 잊혀지다시피 하다 뒤늦게 기념사업이 조금씩 추진돼왔다. 2005년 설립된 손기정기념재단은 지난해 육영재단이 관리하던 손기정의 금메달을 돌려받았다. 2012년은 손기정 탄생 100년이 되는 해다. 서울 중구청은 2012년까지 체육공원 내에 지하 3층, 지상 3층 규모의 손기정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 孫의 우승으로 스포츠 민족주의 초기적 형태를 완성

손기정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우승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대사건이었다. 그것은 1890년대부터 형성되어온 한국 민족주의가 스포츠를 통해 거둔 하나의 커다란 열매였다. 해외로 망명해서 싸운 경우가 아니라면, 일제 치하 조선의 민족주의는 그 실현이 영원한 미래로 연기된 사상이었다.

특히 한반도 안에서 식민지의 대중을 지배한 현실적 이데올로기였던 문화민족주의(실력양성론)는, 일제와 정치적ㆍ군사적으로 대결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래서 문화민족주의자들에게는 문화나 교육 같은 간접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실력이 필요했고 스포츠도 그래서 아주 중요했다. 서양에서 들어온 스포츠는 문명과 근대성의 상징이었고, 외국인과 겨뤄 민족의 실력을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상징적인 매개였기 때문이다.

손기정은 스포츠 민족주의의 정화(精華)가 되었다. 그의 우승은 2002년 월드컵 4강이 그랬듯, 민족적 열등감을 치유하고 ‘민족’으로 식민지인들이 단결하는 계기가 됐다. 8월 한달 전 조선이 신드롬에 휩싸였던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우승 축하회와 축하 강연회, 축하 깃발 행진대회가 이어졌다. 신문은 축전과 축하 광고를 내보내느라 일대 호황이었다. 레코드사는 세계제패 기념 노래를 취입했고 연극단들은 손기정의 우승을 소재로 한 연극을 급조하여 흥행에 성공했다.

꽤나 길게 이어진 그 신드롬은 민족주의와 자본주의가 만들어 증폭한 것이었다. 즉 충분히 발전한 상업적 미디어, 일상화된 유행 현상과 그것을 열심히 추종하는 개인들의 존재, 그리고 민족주의적 대중심리가 넘쳐났기에 가능했다. 한마디로 식민지 조선이 민족주의적 대중사회의 면모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배후에는 가장 이성적이며 음험한 국가이성과 냉철하기 그지없는 자본의 논리도 있었다.

또한 그 신드롬은 큰 후유증과 넓은 공통의 기억을 만들 것이었다. 일장기 말소사건은 손기정이 우승한 지 16일이 지나서, 열기가 농익다 못해 식어갈 즈음에 뒤늦게 일어났다. 이 사건은 총독을 비롯한 식민지 권력이 교체되던 미묘한 시점에서 터져 나와서 식민지의 정국을 확 바꿔놓았다. 더구나 동아시아 각국과 민중의 운명을 바꾼 중일전쟁 한 해 전이었다. 통제와 동원이 필요했던 일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 언론계를 재편하고 부르주아민족주의를 친일로 굴종하게 했다.

그럼에도 손기정 우승으로 인해 한국의 스포츠민족주의는 그 초기적 형태를 완성했다. 한국인은 스포츠 국제경쟁의 중요성에 대해 철저히 깨달았고, 스포츠강국에 대한 깊은 자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

■ 식민지 시대 스포츠 스타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의 울분을 달래주던 스포츠 스타들은 손기정 외에도 여럿 있었다. 대표적인 선수가 자전거 경기의 엄복동이었다.

1900년대 초 자전거가 막 보급되면서 판매 장려를 위한 경기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는데, 차츰 일본인과 조선인 선수간 경쟁의 무대가 됐다. 엄복동은 자전거 판매상 직원으로 일하다 1913년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 처음 참가해 일본 선수들을 제치고 우승했는데, 이후 각종 대회에서 연전연승하며 민족 스타로 떠올랐다. 그는 화끈한 성격으로도 유명했는데, 1920년 열린 경성시민대운동회에서 엄복동이 몇 바퀴를 남겨두고 여유 있게 선두를 지키는 상황에서 일본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키자 본부석으로 달려가 우승기를 꺾어 버렸다. 이에 일본인들이 엄복동을 집단 구타하고 조선인 관중들이 항의하면서 경기가 중단되는 일도 빚어졌다. 엄복동은 1920년대 승승장구하며 ‘떴다 보아라 안창남(한국 최초의 비행사), 내려다 보니 엄복동”이란 노래 가사에 등장하기도 나왔다. 그러나 1930년대 은퇴한 그는 말년에는 떠돌이 생활을 하다 한국전쟁 때 비행기 폭격을 맞아 횡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권투에서는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라이트급 대표로 출전한 황을수가 유명했고, 그 뒤를 이어 ‘독침’이라 불린 서정권이 대스타로 떠올랐다. 1930년대 초 일본에서 27전 전승을 기록한 그는 미국 복싱계로 뛰어들어 세계 랭킹 6위까지 오르는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당시 게리 쿠퍼 등 할리우드 스타들도 그의 팬이었다고 한다. 그는 미국에서 3년여 간 머물며 43전 39승(12KO)3패2무의 기록을 남기고 돌아왔다. 1935년 10월 동대문 경기장에서 열린 그의 귀국 환영 경기에는 조선중앙일보 사장이던 여운형이 직접 나와 격려사를 할 정도였다. 그는 ‘코끼리 같은 양키들을 당당히 물리친 맵고 작은 조선 고추’로 조선인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송용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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