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5년(인조 23) 4월 송시열은 이조판서 이경석의 천거에 의해 출사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말년에 사이가 나빠졌다. 왜 그랬을까?
1668년(현종 9) 11월 27일에 이경석에게는 궤장(几杖)이 내려졌다. 궤장이란 원로대신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주는 의자와 지팡이를 말한다.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모든 관료들이 축하하는 글을 썼다. 송시열도 궤장연(几杖宴)을 축하하는 글을 지었다. 그런데 그 서문에 ‘수이강’(壽而强)이라는 말을 썼다. ‘편안히 오래 잘 살았다’는 뜻이다. 이때만 해도 이경석조차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그런데 1669년(현종 10) 3월 현종이 온천으로 행차하면서 이경석을 유도대신으로 임명했다. 그는 사양하는 글에서 “군왕이 병 치료를 위해 멀리 가는데 문안 드리러 오는 사람이 없다”고 세태를 비판했다. 이 말을 전해 듣고 송시열은 자신을 일컫는 말이라며 대죄(待罪)했다. 그는 이 일로 이경석에게 유감을 가졌다. 그래서 ‘수이강’이라는 말이 송나라 흠종(欽宗)을 따라 금나라에 잡혀간 손적(孫覿)이 아부해 잘 먹고 잘 살았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경석은 향원(鄕愿)의 심리로 청나라 사람의 세력에 아부해 일생을 행세했다. 만일 경인년의 일(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된 일)이 아니면 개도 그의 똥을 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비난했다. 삼전도비문을 쓴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이경석은 송시열이 오해한 것이라며 대꾸하지 않았다.
숭명반청(崇明反淸) 의리를 생명처럼 여겼던 송시열은 청나라를 위해 삼전도비문을 쓴 이경석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경석이 자기를 발신시켜 준 원로인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심하게 공격한 것도 그 때문이다. 송시열과 함께 양송(兩宋)으로 불리던 송준길조차도 송시열의 이런 행위를 과도하게 여겼다.
그러나 송시열을 반대하는 세론이 비등했다. 소론의 여론이 그러했다. 소론 박세당은 그의 이경석신도비명에서 이경석을 군자의 상징인 ‘봉황’이라 하고, 송시열을 불선자의 상징인 ‘올빼미’라 했다. 이경석을 나라의 전형(典型)인 ‘노성인’(老成人)이라 하고, 송시열을 그를 모욕하는 ‘불상인‘(不祥人)’ ‘불선인(不善人)’으로 평가했다.
송시열은 박세당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았다. 박세당이 에서 주자와 다르게 경전을 해석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주자지상주의와 숭명의리로 정국을 좌지우지했고 이에 위배된 것은 모두 이단이요 적당으로 몰았다.
이경석에 대한 핍박은 그가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다. 이경석의 신도비는 노론의 방해로 세우지 못하다가 그가 죽은 지 84년만인 1754년(영조 30)에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받아 세웠으나 글자를 깎고 1세기 간이나 부셔서 있다가 1974년에야 재건되었다. 이경석의 묘와 신도비는 지금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낙생면 석운리에 있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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