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懋官) 이덕무(1741-93)는 시문사대가(詩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방대한 를 남긴 문인이자 실학자며, 그 학문이 고증학에 이르렀다. 정조(正祖) 임금이 등극하며 세운 규장각(奎章閣) 사검서(四檢書)의 첫손으로, 문풍(文風)을 일으키고 실학(實學)을 드높이는 일에 앞장섰다. 그가 함께 펴낸 책 가운데 는 이 시대 실학의 한 상징으로, 이 책을 올리는 글은 실학을 중시한 뜻을 잘 드러냈다. 이덕무는 이 글에서 “성상(聖上)은 좋은 운을 만나 지극한 정치를 하시어 문(文)에 규장각을 두시고, 무(武)에는 장용영(壯勇營)을 두시어…… 를 특별히 제작한 일”이 그 “명실(名實)을 종합한” 보기라고 했다. ()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실용(實用)있는 정책을 강론하고, 백성들은 실용이 있는 직업을 지키고, 학자들은 실용 있는 책을 찬집하고, 졸병들은 실용 있는 기예를 익히고, 상인들은 실용 있는 화물을 교통하며 공장(工匠ㆍ기술자)들은 실용 있는 기계를 만든다면, 어찌 나라를 지키는데 염려하며, 어찌 백성을 보호하는데 걱정이 있겠습니까?”(《국역청장관전서》V)
여기서 실용 있는 정책을 강론한 ‘조정’은 임금의 실용을 가리킨다. 실용이 있는 직업을 지킨 백성은 이 일을 주도한 불세출의 조선 무사(武士) 백동수(白東脩, 1743-1816)이며, 그의 매형(妹兄)이기도 한 이덕무와, 총기에 넘친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15)가 모두 서얼 문인이며, 실용이 있는 책을 찬집하고 기예를 익힌 북학파(北學派)의 실학자들이었다.
특히 정조 임금은 이때가 “임수옹의 가 편찬된 지 30주년이 되는 해이며, 선조 때 펴낸 는 오래되었다”고 전제하고, 병기와 의장(儀仗)과 병법이 흩어진 것은 작은 일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정조의 명에 따라 이덕무는 문헌을 고증하고, 젊은 박제가는 고증과 함께 판목 대본의 글씨를 쓰고, 백동수는 무예를 실기로 고증하며 편찬을 감독했다. 는 이십사반(二十四般) 무예의 실기를 그림과 설명으로 풀어낸 책이며(김영호;《조선의 협객 백동수》푸른역사, 참조), 언해본(諺解本)으로도 펴냈다.
실용을 말하고 실학을 말했지만, 이덕무 등과 함께 이 책의 편찬을 주도한 백동수야말로 18세기 조선 실학과 실용의 한 전범이라 할만했다. 그의 절친한 친구 성대중(成大中)의 아들이기도 한 성해응(成海應)이 쓴 백동수의 일생을 기술한 글에는, 그가 “예법을 중시하는 사람을 만나면 또한 예법에 맞게 그를 상대하고, 글을 짓거나 서화(書畵)를 그리는 선비를 만나면 또한 글을 쓰고 서화를 하는 법으로 그를 상대하였다”고 했다. 또 복서(卜筮)ㆍ의약(醫藥)ㆍ방기(方技)ㆍ술수(術數)에 밝은 선비를 만나면, 역시 모든 거기에 합당한 법도로 그들을 상대하였다”고 했다.(전재교 편역;《알아주지 않는 삶》,태학사, 참조) 이야말로 실학과 실용의 시대 풍경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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