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가슴 깊은 곳에 숨겨놓기만 했는데, 오늘은 온 세상에서 엄마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 편지를 써 보내요."
유진(16ㆍ이하 가명)이는 가슴 깊숙이 끓어오르는 슬픔을 꾹 눌렀다.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를 한참이나 읽어 내려가던 소녀는 결국 울고 말았다. 주르르 흐른 눈물은 애써 사연을 적어온 편지지를 적셨다.
소녀는 초등학교 때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렸다. 알코올중독자인 아빠는 이유 없이 4남매를 때렸고, 급기야 유진이를 성폭행했다. 가출이 잦았던 엄마 역시 아이들을 돌봐주지 않았다. 이웃의 신고로 유진이의 아빠는 쇠고랑을 찼고, 4남매는 보호기관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엄마의 손길이 절실했던 유진이만 시설 입소를 거부하고 엄마가 살고 있는 새아버지 집으로 갔다. 그러나 엄마와 새아버지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유진이의 삶은 다시 엇나갔다. 가출이 잦아졌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잘 알지 못하는 한 남성의 집에서 기거하다가 몹쓸 짓을 당하기도 했다. 주위의 도움으로 유진이는 올해 5월 광주의 한 쉼터로 오게 됐고, 이달 초부터는 그룹홈에서 다시 꿈을 키우고 있다.
22일 오전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에서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이 주최하고, 지식경제부와 우정사업본부가 지원하는 '2010 희망캠프'(1박2일)가 열렸다. 올해 5회째로 전국 아동보호전문기관 34곳의 관계자와 아동 250여명이 참여해 다양한 문화체험을 즐긴다. 이날 진행된 '희망편지 및 그림 공모전'에서 유진이의 사모곡은 대상을 받았다.
캠프에 온 아이들은 모두 가정이나 학교 등에서 학대를 당한 아픈 경험이 있다. 민수(15)는 부모 이혼 후 아빠로부터 이유 없이 폭행을 당했다. 아빠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난 후부터는 동생과 함께 둘이 지내다 올 3월 집세가 없어 쫓겨나 쉼터로 왔다. 혜은(12)이는 정신지체를 앓는 엄마와 알코올중독인 아빠 밑에서 자랐다. 아빠는 혜은이가 학교 가는 것을 막고 집에 가둔 채 흉기로 때렸다. 한달 전 주변의 신고로 쉼터로 왔지만, 아이는 여전히 밤에 악몽을 꾼다.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 김병익 교육홍보팀장은 "이혼 등으로 한 부모 가정이 늘면서 혼자 방치되는 아이들이 증가하고, 아동학대도 늘고 있다"며 "신체학대뿐 아니라 욕설이나 방임 등 정서적인 학대까지 모두 아동학대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에 따르면 지난해 아동학대 신고 건수는 9,309건으로 통계를 잡기 시작한 2001년(4,133건)에 비해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시설에서 보호하고 있는 학대 피해아동 수도 2001년(2,105명)보다 2.7배 증가한 5,685명으로 나타났다.
모진 풍파와 시련이 아이들의 꿈마저 꺾지는 못했다. 이날 공개된 희망편지와 그림들에는 아이들의 꿈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미현(9)이는 '네가 겪고 있는 힘든 시간을 잘 겪어내 하나라도 더 배우고 하나라도 더 익혀서 지금의 나를 고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20년 후의 본인이 현재의 자신에게 보내는 식으로 편지를 썼다.
올해 그룹홈에 들어간 지유(10)는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창가에 놓인 화분을 그려놓고 '그룹홈이라는 하우스 안에서 자라나는 식물들이 가능성이라는 꿈을 믿고 내일이라는 희망을 품고 각자의 개성을 살리며 자라나고 있습니다'라는 팻말을 화분에 꽂았다.
유진이도 "세상에는 따뜻한 사람들이 있고, 나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다독여주는 손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족들과 함께 엄마가 해주는 찌개를 먹으며 학교 이야기와 진로고민 등을 함께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적었다.
아이들의 꿈을 지켜주기 위해선 쉼터 확대와 법 개정 등이 시급하다. 김병익 팀장은 "피해 아동은 늘어나는 반면 쉼터가 턱없이 부족하고, 특히 공동체생활에 불편을 겪는 성학대 피해 아동에겐 전용쉼터가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정새미 광주아동보호전문기관 지도교사는 "학대하는 보호자에 대해 친권상실, 친권제한 등의 조치를 할 수 있도록 법 개정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지원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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