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14일 오전 5시30분께 경기 수원시 수원고 본관 입구 통로 화단에서 신원 미상의 변사체가 발견됐다. 1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소녀의 시신은 온통 멍투성이었다. 이름조차 알 수 없던 소녀의 신원이 밝혀진 것은 시신이 발견된 지 두 달 가까이 지난 그 해 7월. 같은 달 한 방송사의 시사프로그램에서 이 사건을 취재, 보도한 직후 피해자 김모(당시 15살)양의 어머니가 직접 경찰에 찾아왔다.
이후 경찰은 수원역 근처에서 노숙하던 정모(당시 28살)씨 등 2명을 범인으로 보고 기소했다. 김양이 자기 돈을 훔쳤다고 의심한 정씨 등이 김양을 학교로 끌고가 폭행해 숨지게 한 혐의였다. 주범으로 지목된 정씨는 1심에서 징역 7년, 항소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이 판결이 확정됐다. ‘수원 노숙소녀 타살사건’은 그것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사건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2008년 1월께 제보를 받은 검찰은 김양 사건에 대한 재수사에 착수했다. 제보의 내용은 정씨와 어울려 다니던 최모(당시 18살)군 등 노숙하는 10대 4명이 범행을 주도하고 노숙인 정씨 등은 단순하게 참여했다는 것. 검찰은 최군 등을 붙잡아 김양에 대한 상해치사 혐의로 기소했다. 이미 사건이 발생한 지 반년 이상 지나 진술 이외의 물증은 확보하지 못했다. 1심 재판부는 “사건 발생 당시 머리카락 하나까지 물적 증거를 낱낱이 찾아냈어야 하는데 조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며 수사의 허술함을 인정했다. 그러나 ‘꼬맹이들’이라고 부르는 다른 가담자가 있었다는 노숙인 정씨의 진술과 검찰 조사에서 나온 최군 등의 자백에 근거해 재판부는 유죄를 선고했다. 최군은 징역 4년, 나머지 3명은 징역 2~3년을 받았다. 언론들은 잔혹한 10대를 비난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그러나 1심 공판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검찰이 허위자백을 이끌어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최군 등 4명은 검찰 회유에 못 이겨 거짓자백을 했다며 즉각 항소했다. 2심을 담당한 서울고법 형사5부(부장 조희대)는 지난해 1월 이들 모두에 대해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 중 일부는 다른 피고인이 범행을 자백한 것으로 오인하고 검찰조사를 받기도 했고, 당시 상황에 대한 진술이 모순되고 명확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번엔 검찰이 상고했다.
대법원 선고를 하루 앞둔 지난 21일 사건을 맡은 국선 변호인인 박준영 변호사가 검찰과 경찰의 조작수사 의혹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공개했다. 박 변호사가 공개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최군 등 4명이 수사과정에서 혐의내용을 강력하게 부인했지만, 조서에는 이 같은 내용이 반영되지 않았다. 이들에 대한 조사장면이 담긴 영상녹화물에는 수사검사가 “공범들이 모두 자백했으니 부인해봤자 소용없다. 자백하면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다”며 회유하는 모습이 기록됐다.
22일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김양을 폭행해 숨지게 한 혐의(상해치사)로 구속 기소된 최군 등 4명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자백이 상호 모순된 부분이 많고, 당시 수원고 정문에 설치된 무인카메라에 피고인들의 모습이 찍히지 않았으며, 현장에서 피고인의 지문이나 물건 등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며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박 변호사는 “검찰과 경찰이 기본적인 사실확인 없이 10대 피고인들의 허위자백을 받아낸 것”이라며 “수사기관이 치명적 문제점을 노출한 만큼 형사사건 배상청구는 물론 인권유린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문준모기자 moonj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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