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자리에서 세상을 움직이지만 어느 누구보다 무거운 짐을 감내해야 하고, 모든 이의 입에 오르내리며 관심을 받지만 항상 홀로 고독하고, 역사에 의해 선택 받는 행운을 누렸지만 역사가 내리는 어떤 평가든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람들. 그들을 우린 정상(頂上)이라고 일컫는다.
사회적으로 최고의 지위를 누리기에 뭘 말하는지, 뭘 입는지, 뭘 먹는지까지 범인(凡人)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다. 제주신라호텔이 개관 20주년을 맞아 지금까지 호텔을 다녀간 각국 정상에게 내놓았던 음식들을 ‘세계 정상과의 만남’이란 이름의 한식과 양식 코스로 새롭게 구성해 선보이고 있다. 최고를 위한 최고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오미자차, 한식의 가장 아름다운 빛깔”
지난해 6월 한·아세안특별정상회의 참석차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태국 브루나이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10개국 정상이 한국을 찾았다. 폐막일 낮 제주신라호텔에 마련한 오찬에 이들 정상을 초청한 이명박 대통령은 앞치마를 두르고 흰 장갑을 낀 채 숯불 화덕에서 손수 바비큐 꼬치를 구워 정상들에게 대접했다.
그때 그 꼬치구이가 바로 세계 정상과의 만남 한식 코스의 메인 메뉴인 ‘도란도란 바비큐’다. 여러 정상이 모여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이름이다. 쇠갈비뿐 아니라 표고버섯과 전복 마늘 새우 애호박 파인애플 등 채소와 해산물도 함께 나오는 모듬구이다. 종교나 입맛에 따라 선호도가 다름을 배려한 센스가 엿보인다.
당시 후식이었던 오미자차가 이번 한식 코스에서도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창열 제주신라호텔 총주방장은 “오미자차의 붉은 빛은 한식에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색”이라며 “서양 와인과 견주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외국 정상의 식사 방문이 결정되면 주방은 그야말로 비상이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음식부터 사전에 파악한 다음 주방 추천메뉴를 몇 가지 만들어 주최측에 전달한다. 실제 먹을 요리는 추천메뉴 가운데서 바로 선택되기도 하고 서로 협의해 메뉴 일부를 변경하기도 한다. 정진석 제주신라호텔 주방장은 “아예 전문 조리장과 함께 오는 정상도 있다”며 “이럴 경우 식재료나 주방시설만 제공해주는 게 우리 역할”이라고 귀띔했다.
일본 정상 매료시킨 제주의 맛
호텔이 정상에게 추천해온 메뉴에는 제주 특유의 재료나 조리법을 쓴 한식이 많다. 세계 정상과의 만남 한식 코스의 첫 번째 요리인 전복물회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전복물회를 찾았다. 제주식 물회는 갖은 양념과 채소에 고추장과 식초를 넣는 보통 물회와 달리 된장을 추가한다. 제주도 땅이 척박하다 보니 예부터 고추 농사가 잘 안 됐던 탓이다.
지난 5월 제주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담 때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는 전복죽을 선택했다. 이동훈 제주신라호텔 선임은 “제주식은 전복 내장까지 볶아서 갈아 넣기 때문에 색이 보통 전복죽처럼 희지 않고 초록빛을 띤다”며 “녹말성분이 많지 않고 쌀이 알알이 살아 있는 일본식 죽과 달리 제주식은 되직한 점도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이 제주식 전복죽을 하토야마 총리가 한 그릇 다 비웠단다.
2004년 한일 정상회담 때 제주도를 다녀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는 제주식 궁중 용궁신선로를 맛봤다. 원래 신선로 육수는 쇠고기 양지로 만든다. 제주신라호텔은 고기육수 대신 모시조개와 중합으로 우려낸 해산물육수를 썼다. 이 용궁신선로는 세계 정상과의 만남 한식 코스에서 세 번째 요리로 등장한다. 한치와 새우 생선살 관자까지 곁들여진 신선로에서 바다내음이 배어 나오는 듯하다. 신선로 직전 매생이 성게죽이 나온다. 이 역시 2004년 한일 정상회담 때 고이즈미 전 총리가 먹었던 요리다. 성게알이 들어갔다는 점이 보통 매생이 죽과는 다르다. 제주산 성게는 맛이 특히 고소하단다.
한식 코스 다섯 번째 요리는 보말 미역국이다. 보말은 고둥을 뜻하는 제주도 사투리. 참기름에 볶은 보말 속살을 미역과 함께 넣고 끓인 보말 미역국은 피로를 풀어주고 체력을 증진시킨다. 2004년 한일 정상회담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룸서비스 아침식사로 보말 미역국을 먹었다.
정상 만찬도 트렌드 변화
1990년 소련 최초의 대통령이 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이듬해 제주도를 방문해 노태우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세계 정상과의 만남 양식 코스는 당시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만찬에 올라갔던 제주해산물모듬 전채요리로 시작된다. 그때 그대로 커다란 조개껍데기에 담겨 나온다.
정 주방장은 “20년 전엔 고급요리로 프랑스 음식을 주로 내놓았지만 현대 들어선 퓨전식이 점차 느는 추세”라며 “고급요리의 테이블 세팅도 과거엔 대부분 프랑스식처럼 화려하고 고전적인 스타일이었지만 요즘엔 심플하고 깔끔한 쪽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접시만 해도 당시엔 꽃 무늬가 많았다면 지금은 깨끗한 흰색이 대세라는 것.
세계 정상과의 만남 양식 코스는 서양식에 한국과 제주의 맛을 입히는데 초점을 뒀다. 1996년 한미 정상회담 때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먹고 간 메인 요리가 이번 양식 코스 세 번째 메뉴인 철갑상어알과 버터소스로 버무린 제주 옥도미찜이다. 생선요리도 10∼20년 전엔 주로 쪄냈는데, 요즘은 프라이팬에서 껍질이 바삭바삭해지도록 굽는 경우가 많다.
옥도미찜에 이어지는 쇠안심 스테이크는 1992년 방한한 보두앵 1세 벨기에 국왕에게 선보인 메뉴다. 여기엔 세계 3대 진미로 꼽히는 송로버섯 소스를 얹는다.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이 먹고 간 아스파라거스 크림수프와 딸기 샤롯데, 리펑 전 중국 총리의 향신료 샐러드도 있다. 1인분 가격 한식코스 7만8,000원, 양식코스 8만원.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 '김영삼 전복물회' '고르바초프 해산물모듬' 집에서 만들어 보세요
정상이 즐긴 최고의 요리, 집에서도 만들 수 있다. 20여 년간 각국 정상 수십 명의 만찬을 만들어온 이창열 제주신라호텔 총주방장이 한식과 양식 코스에서 가정식 레시피 하나씩을 살짝 공개했다.
먼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찾았던 제주식 전복물회. 전복은 손질해서 내장을 분리한 다음 먹기 좋은 크기로 채 썬다. 오이와 무 깻잎은 3∼4cm, 미나리와 실파는 3mm 크기로 송송 썬 다음 물기를 뺀다. 물에 된장과 고추장을 풀고 고춧가루 백설탕 마늘즙 생강즙 참깨 식초 참기름 다진 파를 넣어 육수를 만든다. 제주식 물회의 핵심은 바로 이 육수다. 여기에 채소와 전복을 넣고 마지막에 배를 오이만하게 잘라 넣으면 된다. 배는 미리 잘라두면 갈색으로 변한다.
양식으론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맛본 제주해산물모듬이 간단하면서도 분위기 내기에 좋다. 전복과 돌문어 관자 한치 새우 등 신선한 해산물을 데쳐 허브오일에 재워뒀다 프렌치드레싱에 무쳐내면 완성. 프렌치드레싱이 없으면 직접 만들어도 된다. 계란노른자와 올리브오일을 거품기로 가볍게 섞어 마요네즈처럼 만든 다음 식초와 소금 후추 레몬주스를 넣으면 바로 엄마표 프렌치드레싱이다. 조개껍데기 모양의 접시를 쓰면 바다내음까지 담아 나온 듯한 분위기도 연출할 수 있다.
임소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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