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로당 지도자 박헌영(1900~1956)이 남한에 남긴 유일한 혈육인 원경(圓鏡) 스님이 1970년대부터 남몰래 써왔던 시를 (시인 발행)라는 시집으로 묶었다. 2004년 아버지의 행적을 정리한 (전9권)을 출간했던 그가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내기는 처음이다.
원경 스님은 박헌영의 두번째 부인(2004년 작고)이 1941년에 낳은 아들로, 아버지가 잠적한 후 어머니와도 헤어져 우여곡절 끝에 열 살 때 한산 스님을 만나 절에서 성장했다. 좌우 이념 대결 속에서 무려 14개의 이름을 쓰며 살았다는 그는 1960년대에 정식 출가해 수행에 전념, 지금은 평택 만기사 주지로 있다. 올해 고희를 맞은 스님은 “한산 스님이 생전에 글 쓰는 것은 삼갈 것을 당부해 그동안 써 놓은 것들을 감춰뒀다가 뒤늦게 주변의 권유로 출판하게 됐다”고 말했다.
수십년 간 써온 500여 편의 시 중에서 230편을 묶은 는 스님의 고단했던 마음의 여정을 담고 있다. 자신의 서글픈 운명에 대한 회한에서부터 자연을 보는 동심 같은 천진난만함까지, 다양한 세계가 어우러져 있다. ‘벌판의 허수아비처럼 혼자 헤매보니/ 나는 까닭없이 서러워지네/…/ 나 홀로 남겨놓고 이 세상 모두가 떠나가는데’(‘혼자 남아서’)에서는 외로움이, ‘시샘도/ 간절함도 없네/ 오직 발돋움인양 애타는/ 기다림이 있었네/ 환희가 들뜬 거리로 나둥그러진/ 기약 없는 내 눈길’(‘기다림’)에서는 부모에 대한 짙은 그리움이 묻어난다.
스님과 동갑내기 친구인 김지하 시인은 추천사에서 “참으로 예쁘고 참으로 서럽고 또 참으로 웅장한, 그야말로 가장 스님다운 선시(禪詩)”라며 “산촌의 새벽 계명성 같다. 또는 등불 같은 연꽃을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송용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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