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평생 단 한 차례 해외 여행을 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중미 카리브 해의 영국령 바베이도스 섬을 찾은 적이 있다. 이 때 카리브 연안 항구들이 유럽 상품을 신대륙으로 운송하는 거점 노릇을 하는 것에서 국제무역과 해상 수송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 경험이 1775년 독립전쟁을 이끌면서 해군 창설에 앞장선 바탕이 됐다. 당시 대륙의회는 민간 선박을 모아 막강한 영국 해군에 맞선다는 구상을 터무니없게 여겼다. 그러나 그는 영국 해군의 동부 무역항 공격을 어떻게든 방해해야 전쟁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었다.
■워싱턴은 작은 범선 11척과 어부를 모아 영국 수송선을 기습, 탄약과 물자를 탈취하는 데 주력했다. 이게 주효해‘워싱턴 함대’는 몇 달 만에 적선 55척을 나포했다. 그러자 대륙의회는 해군위원회를 만들고 50만 달러를 지원해 70톤 안팎의 범선 4척을 사들여 무장을 갖추고 고속 범선, 프리깃(Frigate)함 13척을 서둘러 건조하도록 했다. 이 범선 가운데 하나는 1775년 10월 워싱턴호(USS Washington)로 명명됐다. 워싱턴의 이름을 붙인 최초의 군함인 이 배는 그러나 두 달 뒤 영국 해군에 나포돼 보스턴 항에 폐선처럼 버려졌다.
■이후 3척의 함선이 워싱턴호로 명명됐으나, 모두 이내 침몰하거나 나포 됐다. 프리깃함 13척도 전쟁 중 모두 비운을 겪었다. 그러나 초대 대통령에 오른 워싱턴은 미국이 대서양 너머까지 무역을 비롯한 활동 영역을 넓히려면 해군력 확대가 긴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1794년 의회는 해군 건설법을 제정, 세계 최강 해군의 기초를 마련했다. 미 해군은 국부(國父)이자 해군의 아버지인 그를 추앙해 지금까지 모두 4척의 군함을 조지 워싱턴호(USS George Washington)로 명명했다.
■1798년과 1908년에 이어 1959년 최초의 탄도미사일 핵잠수함(SSBN-598)이 명예로운 이름을 달았다. 이 핵잠수함이 1985년 퇴역한 다음해, 6번째 니미츠급(9만7,000톤) 항공모함 건조에 들어간 해군은 그 명예를 아껴두었다가 1990년 취역을 2년이나 앞둔 이 슈퍼 항모에 안겨주었다. 이런 내력을 소개한 조지 워싱턴호 홈페이지는 함정 표어‘자유의 정신(The Spirit of Freedom)’이 국부 워싱턴의 비전을 기리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논란을 거듭한 조지 워싱턴호와의 동해 한미 연합훈련이 군사적 차원을 넘는 역할을 했으면 한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