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따로 또 같이, 다문화 우리문화!] <1부> (5) 예술 속 이야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따로 또 같이, 다문화 우리문화!] <1부> (5) 예술 속 이야기

입력
2010.07.20 12:15
0 0

■ 연극 무대에 선 이주여성들 "대본 속엔 차별 없어요"

7일 오후 철공소가 밀집한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2가. 퉁퉁, 탕탕, 끼이익…. 쇳덩이를 다듬는 소리가 길거리에서 정신없이 섞여나오고, 파이프를 만드는 한 철강업체 건물에서는 귀를 찢을 듯한 기계음이 요란하다. 사람 소리가 끼어들 틈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묵직한 공간. 헌데 그 건물 한 켠에 있는 입구에 들어서니 딴 세상이다. “아, 예, 이, 오, 우~” “아, 아, 아, 아, 아~”. 학교 음악 시간에 했던 발성 연습이 귀에 낯설지 않다.

공장에 웬 노래소린가 싶어 들여다 봤다. 빨강, 노랑, 초록 등 마치 무지개 떡을 붙여놓은 듯한 사무실 벽면이 눈에 띄고, 옆방에선 대사를 외우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다. 각기 피부색이 다른 여성들이 연극 삼매경에 빠져 있는 모습. 서툰 우리말 대사를 되풀이하며 뜻 하나하나까지 되뇌는 모습이 또렷하다.

이곳은 국내 최초 이주민 극단 ‘샐러드’의 연습실 겸 사무실이다. 말, 문화, 국적이 다른 이주 여성들이지만 자신들처럼 한국에 온 여성들의 처지와 삶을 이해시키고, 함께 사는 가치를 연극으로 알리고 싶어 열정으로 모인 다문화 연극모임이다.

극단 샐러드는 지난해 1월 ‘이주여성 연기 워크숍’에 참가한 중국 몽골 터키 필리핀 스리랑카 베트남 방글라데시 등 7개국 이주여성 10여명이 모여 다문화 사회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연극으로 풀어보기 위해 만든 예술단체다.

정부가 2008년 실시한 이주민 문화향수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거주 노동ㆍ결혼 이주민 10명 중 8명꼴로 이주민과 이주민 가족에 대한 우리사회의 차별이 심하다고 느끼고 있다. 더불어 사는 데 대한 우리의 부족함이 여실이 드러난다. 이런 문제 의식에서 극단 이름을 채소와 과일, 고기 등 각기 다른 재료가 뒤섞여 고유의 맛을 그대로 간직한다는 서양음식 샐러드에서 따왔다. 사무실 벽면을 여러 색이 모여 조화를 이루는 무지개 색으로 칠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박경주(40) 대표는 “연극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주민도 우리 사회의 일부분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극단이 구성됐다”고 설명했다.

배우들은 창단 후 5개월 동안 연기를 다져 그해 6월부터 대본 작성과 연극 연습을 두 달 넘게 병행했다. 9월 창단공연으로 ‘맛있는 레시피’를 서울 성미산 마을극장 시민공간 나루무대에서 첫 선을 보였고, 인천월미평화축제 초청공연, 광주 매개공간 미나리 초청공연, 서울여성프라자 아트홀 등에서 순회공연을 하며 전문 극단의 틀을 갖췄다.

공연은 다국적 이주여성들로 구성된 극단 배우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장면을 만들고 대본을 구성하는 공동 창작의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작품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작품엔 이주여성들의 진솔한 삶과 우리사회의 다문화 시각이 그대로 녹아있다. 맛있는 레시피라는 작품도 이주 여성들이 일하던 식당이 폐업할 위기에 빠지자 이들이 식당을 인수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요리 경연대회에 나간다는 내용이다. 공연기획을 맡은 노선정(37)씨는 “이주여성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보여주고 싶었다”며 “음식을 나눌 때 서로의 정이 담기는 것처럼 문화도 나눌 때 가치가 더 커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문제는 단원들의 극단생활이 녹록지 않다는 점이다. 주로 경기 안산 안양 수원 인천 등에 사는 탓에 영등포까지 오가는 데 2시간 이상 걸린다. 연기 경험도 없어 발성부터 호흡, 대본 외우기까지 서툴고 어색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열정은 누구보다도 최고다. 집이든 버스든 길거리든 있는 곳이 연습실이다. 때론 연출자에게 호된 꾸짖음과 질책을 받기도 했지만 연기는 타향살의 외로움을 털어내는 원동력이기에 힘이 절로 솟는다. 스리랑카에서 온 이레샤(34)씨는 “다문화라는 말에 갇혀 생활하기보다는 이주여성들이 서로 함께 활발하게 이야기하려고 모였다”고 했고, 필리핀 출신 로나(26)씨는 “한국사회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이주여성들을 차별하지 않고 따뜻하게 대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가장 큰 고통은 가족들의 극심한 반대였다. 연습에 매진할수록 집안일에 소홀해지는 날이 늘자 남편들의 성화는 커졌고, 급기야 하나 둘 극단을 떠나는 이도 생겨났다. 하지만 이들의 열정은 누구도 꺾지 못했다. 마침내 첫 공연이 열리자 가족이 제일 먼저 앞좌석을 차지했다. 조선족 출신 김계화(33)씨는 “첫 공연을 본 후 남편이 가장 흐뭇해했다”며 “이젠 연습이 바쁠 때 남편이 대본을 함께 읽어주고 여섯 살 난 딸을 더 잘 돌봐주는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고 기뻐했다.

이들의 소박한 바람은 한국인들의 인식 변화다. 자신과 같은 이주민들이 이곳에서 남이 아닌 우리로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몽골 출신 다시마(26)씨는 “다르다고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개개인의 고유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서로 어울려 사는 사회가 돼야 한다는 것을 연극으로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박관규기자 ace@hk.co.kr

■ 인터뷰/ 최윤정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예술국 전문위원

“이주민들이 가장 힘겨워하는 건 언어장벽입니다. 비언어적 방식인 예술교육을 통해 이주민들이 자기표현 욕구를 충족하고, 자아실현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윤정(32ㆍ사진)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예술국 전문위원은 중앙 부처에선 유일하게 다문화예술교육을 전담하는 전문가다.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전공했고 대안문화관련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2006년 문화부에 특채돼 문화행정가로 거듭났다.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다문화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부터. 문화부는 ‘지역 다문화’ 프로그램을 통해 지난해와 올해 전국에서 다문화예술교육을 지원하는 기관 28곳을 선정,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이주여성과 지역민이 함께하는 합창단, 이주여성 대상 영화제작 워크숍, 이주민이 참가하는 연극 아카데미, 동화구연교육 등이다.

최 위원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사무국이 진행하는‘이주여성 영화제작 워크숍’을 성공사례로 꼽는다. 이주여성들은 사무국에서 파견한 강사들에게 2개월 정도 영상제작교육을 받은 뒤 10분 분량의 단편 다큐멘터리를 찍어 영화제에서 상영한다. 고부간의 갈등, 문화차이에서 빚어진 오해, 고향 가족에게 전하는 소식 등이 소재다. 4월 열린 영화제에도 이주여성의 삶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10편이 상영됐는데 이중 2편은 이주여성들이 직접 만든 작품이다. 이런 문화예술교육은 이주여성들이 자신의 존재를 보다 쉽게 알림으로써 가족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지역주민들과 소통의 계기도 된다는 게 최 위원의 설명이다.

‘다문화 강사 양성’ 프로그램도 좋은 예다. 다문화인들이 박물관의 콘텐츠를 활용해 자국의 문화를 일반인에게 교육할 수 있도록 한 과정이다. 이수한 다문화인들은 지역 초등학교나 도서관, 문화원 등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문화를 소개함으로써 지역문화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은 많은 게 부족하다. 1,100억원이 넘는 올해 중앙정부의 다문화정책 예산 가운데 예술교육에 배정된 예산은 고작 19억원. 돈도 부족하지만 다문화정책의 최전선인 지자체의 무관심도 문제라고 그는 지적한다.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하려고 지자체로 연락하면 대부분 문화예술담당자가 아니라 복지담당에게 연결됩니다. 예술문화정책을 사회복지가 아니라 다문화인들이 우리와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게 하는 좋은 매개체로 인식했으면 좋겠어요.”

이왕구기자 fab4@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