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새문안길 서울역사박물관 앞에는 전시용 전차 한 대가 서있다. ‘381’이라는 차량번호와 ‘광화문’이라는 행선지 표지판이 걸려있는 전차,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막 발차한 전차의 차체를 두드리는 중년 여성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작품은 나이 지긋한 서울 토박이들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자아낼 법도 하다.
1930년께 일본에서 들여온 전차는 식민지시기, 해방공간, 한국전쟁기, 산업화시기를 거쳐 1968년 11월 서울에서 전차 노선이 폐선될 때까지 40년 가까이 서울 거리를 누볐다. 우리나라에 전차 궤도가 처음 놓여진 것은 1898년 12월(운행은 1899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본격적인 전차시대는 서울 곳곳에 정교한 전차 노선이 개통된 일제강점기라 할 수 있다. 외양은 일제시대 모습, 내부는 해방 후의 형태로 복원된 전차가 서있는 새문안길에서도 광화문에서 마포를 잇는 마포선 전차가 달렸다.
기차, 자동차와 함께 근대교통의 상징으로 꼽히는 전차가 우리 땅에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구한말. 서대문-동대문-청량리를 잇는 첫 전차 노선이 놓여진 것은 명성황후의 무덤이 있는 홍릉에 행차하는 고종 황제의 편의를 위해서였다고 한다. 전차의 속도는 시속 20㎞를 넘지 못했지만 탈것이라고는 인력거나 자전거 정도밖에 없던 당시에 길 위를 빠르게 달리는 전차는 신기하고 놀라운 볼거리였다.
개통 직후에는 하루 종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등 구경하기 위해 전차를 타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부정적 인식도 퍼졌는데 전차가 정식으로 다니기 시작한 1899년 봄, 큰 가뭄이 들자 ‘전차선의 전깃줄이 천지 간의 수분을 다 흡수했기 때문’이라는 유언비어가 돌기도 했고, 한 어린이가 전차에 치여 죽는 사고가 나자 흥분한 군중이 전차를 부수고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했고 전차는 ‘살인기계’로까지 취급받았다.
이때만해도 전차는 교통수단이라기보다는 경이와 공포라는 양가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독특한 볼거리에 불과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 전차는 비로소 식민지 서울 사람들의 대중교통 수단으로 자리잡는다. 총독부의 도심 도로 건설과 맞물려 광화문-의주로(1915), 종로-안국동(1923), 남대문-광화문(1928), 서대문-마포(1936), 노량진-신길동(1943) 등에 전차 노선이 신설되면서 도시의 풍경과 속도감은 크게 바뀌었다.
1910년 하루 평균 9,810명이었던 이용객은 1915년 3만9,410명, 1925년 9만1,636명으로 늘어났고 1935년 무렵에는 하루 15만명이 전차를 이용할 정도로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도시민들의 여가생활에도 전차는 긴요한 수단으로 자리잡았다. 창경원이나 청량리 교외의 꽃구경, 한강에서의 보트놀이가 대중화한 것은 전차 덕택이었다. 특히 창경원 벚꽃이 절정에 이르는 4월이면 종로4가와 원남동 일대에서는 차마(車馬)가 통제되는 대신 창경원선 전차 18대가 증발 운행됐다. 1933년 봄 창경원 일대의 풍경을 잡지 ‘별건곤’은 이렇게 묘사했다. “전차는 첫날부터 끔직끔직하게 인육을 집어삼켰다 뱉었다 터질 것만 같은 기름을 짜면서 서대문서부터 창경원까지 굴러갔습니다. 창경원 입구서부터 발 하나 놀 수 없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사람에 밀리어 들어가니 보러온 꽃은 보이지 않고 시커멓게 밀리는 인파만이 와글와글 눈을 오로지 빼앗고 말았습니다.”
1930년대 후반 아현동에서 청량리의 경성제대 예과학교까지 전차로 통학을 했던 장세헌(88) 서울대 명예교수(화학)는 “서대문 정류장에서 전차를 타 종로와 동대문에서 환승해 등교했는데 주요 환승 정류장에는 줄이 수십 미터씩 길게 늘어서 있었다”며 “만원이 된 전차에 1시간 동안 매달려 학교에 도착하면 기진맥진하곤 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전차는 도시의 풍경을 바꾸었을 뿐 아니라 시간관념도 바꾸었다. 사람들은 전차를 타고 내리며 자연스럽게 기계적 시간 개념에 따른 근대적 시간의 규율을 몸에 익히게 됐다. 이용객의 폭증에 따라 사고도 크게 늘었다. 1921년에는 200건이 넘는 사고가 발생했고, 1922년 발생한 교통사고 436건 가운데 전차사고가 301건일 정도였다.
잦은 탈선, 고장 등에도 불구하고 전차가 시민의 발로 자리잡자 증차와 노선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날로 높아졌다. 새로운 노선이 속속 깔렸지만 노선 배정에서도 민족차별은 엄존했다. 식민지시기 서울의 일본인들은 남촌 지역에 주로 살고 조선인들은 북촌 일대에 많이 거주했는데, 전차 노선은 일본인들의 거주지인 을지로 인근에 편중됐다. 가령 혜화동과 을지로4가를 잇는 충무로4가선은 을지로, 충무로 지역의 일본인들이 혜화동의 총독부의원이나 창경원에 쉽게 갈 수 있도록 만든 노선이었다.
요금체계도 불공평했다. 일본인들의 거주지역인 용산지역은 시내선 요금을 받았으나 도심에서의 거리가 용산보다 더 가까운 청량리, 마포, 동대문 등은 그 2배인 교외선 요금제를 적용해 이곳에 사?조선인들의 공분을 샀다. 1920~30년대 북촌지역과 왕십리 등 교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교외선 요금제 폐지와 조선인 거주지역 전차노선의 신설, 복선화 등을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전차운영회사인 경성전기는 예산 부족을 핑계로 겨우 교외선 요금 인하로 불만을 무마했다.
또 전차 승무원들의 불친절로 회사 이미지가 나빠지자 경성전기는 1935년부터 여성차장을 고용하는 방식으로 이미지 개선을 꾀하려 했다. 대개 10대 후반의 조선인 여성들이었는데 이들은 남성의 절반 수준의 저임금에 하루 13~14시간의 중노동과 일부 승객들의 성희롱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1920년대말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버스가 등장하기는 했지만 전차의 상대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40년대초 전차를 이용했다는 박현서(80) 한양대 명예교수는 “태평양전쟁 말기가 되자 가솔린을 사용하는 자동차는 군용차량이나 조선총독부 고관들이 이용하는 택시 외에는 서울 거리에서 자취를 감췄고 오직 전차만이 다녔다”고 당시를 돌이켰다. 박 교수는 “서울역을 출발한 전차가 조선신궁이 있는 남산 밑 남대문정류장에 들어설 때마다 차장이 승객 모두에게 자리에서 일어나 신궁 쪽을 향해 요배(遙拜)하라고 방송해 울분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정재정(60) 서울시립대 교수는 “종로와 청량리를 관통하는 전차구간을 따라 1970년대 지하철 1호선이 건설되는 등 전차는 현대 서울의 도시공간구조의 원형태를 간직하고 있었다”며 “특히 일본인 독점자본이었던 경성전기의 민족차별적 노선 건설로 빚어진 조선인의 반발과 저항 등은 식민지 권력과 시민들의 일상의 관계를 연구하는 현대사 연구자들에게도 관심있는 연구과제”라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 1926년 경복궁 영추문이 무너진 이유는…
1926년 4월 27일 오전 조선의 정궁이었던 경복궁 서쪽문인 영추문(迎秋門) 한 쪽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붕괴 이유는 다름아닌 전차 때문이었다.
남산에 있던 조선총독부는 10여년 간의 공사를 거쳐 1926년초 경복궁 내로 이사했는데, 총독부는 경복궁 내 공사장까지 전차 차로를 연결해 공사자재를 운반했다. 동대문 석산에서 채취한 화강암, 한강의 모래와 마포 연와공장의 벽돌 등이 모두 전차로 옮겨졌다. 그 전차선의 종점이 영추문 앞이었다. 영추문이 무너지기 한 달 전 광화문에서 총독부까지의 전차 구간이 복선화됐다. 전차 선로는 궁궐의 담 가까이 깔려 있었고 전차의 진동을 견디지 못한 영추문은 속절없이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연 많은 영추문의 복원은 50여년이 지난 1975년에 이뤄졌다. 그것도 원래의 자리에서 50m나 북쪽으로 옮겨졌다.
경복궁의 서십자각이 사라진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1920년대초 경복궁 전경 사진을 보면 서십자각의 모습이 나타나지만, 1926년 이후에는 자취를 감춘다. 1926년 10월 5일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부업품공진회의 관람객 수송을 위해 조선총독부가 적선동 방향으로 전차 선로 부설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서십자각이 희생된 것이다. 경복궁 동편으로도 전차 선로가 깔렸지만 안국동 방향으로 직선 선로만 개설됐기 때문에 동십자각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왕구기자
■ 전차는 서울의 외연 확대·도시화 촉진…근대 특징인 '시공간의 압축' 이끌었다
1899년 5월 6일, 서울 종로 거리에 전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눈 앞에 요술이 펼쳐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근대화라는 거대한 요술쇼의 개막 공연이었을 뿐이다.
조선시대에는 탈것에도 등급이 있어 왕이 타는 것, 고관이 타는 것, 양반이 타는 것이 다 달랐다. 그런데 전차는 돈만 내면 신분과 지위에 관계 없이 누구나 탈 수 있었다. 전차는 남녀도 구별하지 않았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관념은 좌석에 앉으려는 욕망 앞에서 속절없이 스러졌다. 전차 승객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대중'이라는 근대 사회의 새 주인공이 되었다.
전차는 상품경제의 체험장이기도 했다. 전차 차체에는 성냥, 석유, 담배 등의 광고 문구가 붙었다. 이 문구는 전차에 타는 사람이나 전차를 보는 사람에게 상품의 존재를 알렸다. 사람이 물건을 찾아다니는 시대가 가고 상품 정보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시대가 열렸다.
전차가 등장한 그 무렵 전화기, 시계, 방직기 등 새로운 기계들도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주위에 기계가 늘어나자, 사람들은 비로소 '모든 유기체는 기계'라는 데카르트적 생체관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같은 인간관의 변화는 다시 개인을 국가의 부품으로 보는 근대적 국가관을 낳았다.
전차는 또 교외 지역을 도성 가까이 끌어당겼다. 사람들은 처음 호기심에서 전차를 탔지만, 곧 도성 내 교통수단으로는 별 매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대문에서 동대문까지의 거리는 고작 3km 남짓이었다. 사람들은 동대문 밖 논밭이 펼쳐진 곳을 지나 청량리로 놀러 갈 때에야 비로소 전차의 쓸모를 실감했다. 비번의 군인들이 무리를 지어 전차 타고 교외로 놀러가는 모습이 서울의 일상 풍경에 추가되었다. 전차는 그렇게 서울의 외연을 넓혔고, 도시화를 촉진했다.
무엇보다도 전차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사람들의 감각을 바꾸어 놓았다. 10리니 20리니 하는 순 공간적 척도나 반나절 행보니 하루 길이니 하는 순 시간적 척도는 의미를 잃고 '시속(時速)'이라는 시공간을 결합한 새로운 개념이 떠올랐다. 전차는 근대의 본질적 특징인 '시공간의 압축' 과정을 앞에서 이끌었다.
일제는 이 '근대의 총아'가 자기들 통제 밖에서 달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2대 한국 통감 소네 아라스케의 아들이 설립한 일한와사주식회사는 1909년 전차의 임자이던 한미전기주식회사를 사들였다. 전기 사업을 추가하여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가 된 이 회사는 서울 일원의 전기, 전차, 가스 사업을 독점했고 1915년 9월 16일 경성전기주식회사로 개칭했다.
전우용ㆍ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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