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플의 상생 시스템, 하청업체에 구매 6개월전 수량·가격 예고
# 전자부품 A사는 지난해 애플사의 엔지니어로부터 e메일 한 통을 받고 깜짝 놀랐다. 애플사의 엔지니어는 A사의 기술에 대해 문의한 뒤 납품업체 등록 절차에 대해 설명을 해 줬다. 회사 등록 절차는 간단했다. 연락처와 직원수, 환경정책 등을 올렸다. 이후 애플사로부터 부품 승인 통보가 왔다. 이러한 결정이 날 때까지 A사가 특별히 로비를 하거나 인맥을 동원한 것은 전혀 없었다. 부품의 도면이나 거래처의 리스트를 제공할 필요도 없었다. 애플이 요구한 품질의 부품을 생산할 능력을 입증해 보인 것이 전부였다.
A사가 애플과의 거래에서 더욱 놀란 것은 단가 정책. 신모델의 경우 신규 투자를 한 점을 고려, 단가를 다소 높게 제출했는데도 애플사의 구매 담당자는 흔쾌하게 승인을 해 줬다. 이유가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협상을 하는 것이지 일방적 통보를 받는 게 아니었다. 특히 이 가격은 1차 협력업체 뿐 아니라 2,3차 업체에도 모두 공개됐다. 1차 협력업체가 애플을 핑계로 2,3차 업체의 납품가를 무리하게 깎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애플은 특히 매주 ‘콘텐트 리프레시’(content refresh)라는 e메일을 발송했다. 납품 단가를 비롯해 제품이나 회사의 정보에 변화가 있을 때 적어 내도록 한 것으로, 타당할 경우엔 이를 납품 단가에 자동 반영토록 아예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A사가 애플과의 거래에서 가장 고마웠던 것은 바로 구매 예정 수량을 무려 6개월 전에 미리 알려주는 점이었다. 애플의 구매 시스템에서는 매주 6개월치 구매 예정 수량이 1차 납품업체와 2,3차 하청 업체 할 것 없이 동시에 업데이트된다. ‘구매 예정 수량을 정식 발주로 간주하지 말라’는 꼬리표가 붙긴 하나 지금까지 구매 예정 수량이 미달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만약 불가피하게 감산을 하게 될 경우엔 적어도 3개월 전에는 미리 양해를 구하고, 혹 문제가 있으면 얘기해 달라는 정중한 e메일이 온다. 적어도 3개월치 물량이 변동되는 일은 없다는 얘기다.
A사는 그러나 관련 업계의 한 국내 대기업과 같은 거래를 할 때는 마치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듯한 경험을 했다. 일단 대기업 직원은 회사로 찾아 와 원가 계산서를 요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납품 단가를 후려쳤다. 가장 어려운 것은 주문이 일주일 단위로 돌아간다는 것. 그것도 대부분이 구두 주문이었고, 상황이 바뀌면 다시 구두로 취소해 버리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이런 일이 형식적으로는 대기업의 1차 협력 업체를 중간에 둔 채 이뤄졌다. 결국 A사가 이 대기업과의 거래를 18개월여 만에 끝냈을 때 남은 것은 수억원 어치의 재고뿐이었다.
하청 업체 입장에서 본 외국과 우리 대기업의 차이이다. 글로벌 기업이 납품 중소기업 업체들을 최종 제품을 잘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파트너로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데 비해 우리 대기업은 ‘갑’과 ‘을’의 관계로만 보고 착취하려 든다는 게 현장 목소리다.
문제는 이런 관행 아래서는 21세기 새로운 경쟁의 틀인 ‘기업 생태계’를 조성할 수 없다는 데 있다. A사 관계자는 “애플의 경쟁력은 ‘기업 생태계’를 통해 중소기업이나 개인들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열린 마당을 제공한 데 있다”며 “납품기업들을 쥐어짜서 이익을 올리는 방식을 통해선 더 이상 이런 ‘글로벌 기업 생태계’와 경쟁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도 “중소기업들이 원하는 건 우리 대기업이 해외에선 글로벌 스탠더드에 입각한 구매를 하면서도 유독 국내서는 전근대적인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대기업의 막대한 이익을 시혜적 차원에서 중소기업에게 나눠 달라는 게 아니라 국내서도 해외에서처럼 공정한 거래를 해 달라는 것 뿐”이라고 말했다.
박일근기자 ikpark@hk.co.kr
■ "하도급 불공정 거래,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 목소리 확산
대ㆍ중소 기업 간 부당한 거래를 막기 위해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구두 발주ㆍ구두 취소 등 거래상 우월한 지위를 남용한 하도급 불공정 거래에 대해 실제 손해액 보다 훨씬 큰 배상액을 물리는 것. 징벌적 성격의 손해배상액을 통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는 취지다. 구두 주문이 근절되지 않는 것은 적발이 된 경우에도 처벌이 미미하기 때문이라는 게 이 제도 도입을 주장하는 배경이다. 이미 공직선거법에 따라 금액 또는 물품을 제공 받은 경우 10배 이상 50배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글로벌 발주시스템을 어느 정도 지키는 지 평가하는 지수를 개발, 주요 대기업의 발주 과정 등을 조사한 뒤 분기별로 공표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몇 개월 전 미리 구매 예정 수량 등을 통보, 안정적 운영을 지원하는 글로벌 발주 시스템을 우리 대기업이 국내에서 얼마나 준수하고 있는지를 계량화해 순위를 매기면 기업들이 적극 나서지 않겠느냐 하는 발상이다.
유지 보수비도 국제적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국내 소프트웨어 개발 용역의 경우, 개발 후 유지 보수비를 아예 주지 않거나 지나치게 낮게 적용하는 관행들이 남아 있다. 하드웨어의 경우도 유지 보수를 받을 경우 외국 업체에겐 수리비를 지급하면서도 국내업체에는 지급하지 않는 경우들이 많다. 이처럼 잘못된 유지 보수비 관행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야 한다는 얘기다.
한편 납품 후 발주 기업이 특별한 이유 없이 검수 또는 세금계산서 발부를 늦춰 결과적으로는 대금 결제를 미루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한 이행 확보 수단들도 추진돼야 한다는 게 중소기업 업계 바람이다.
강희경기자 kstar@hk.co.kr
■ "글로벌 단가 경쟁 대기업도 생존 문제"
대기업이 중소기업들의 납품 단가를 후려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최근 그 강도가 더 심해지고 있는 것은 전 지구적 구매(글로벌 소싱) 및 공급망 관리(SCM)에서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
대기업의 한 임원은 “우월적 지위를 남용, 납품 단가를 과도하게 깎아 대기업만 너무 배를 불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많지만 상황을 국내만 놓고 보면 안 된다”며 “글로벌 경쟁 기업들이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더 낮은 가격으로 부품을 구매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대기업에게도 (구매단가 인하는) 생존의 문제”라고 말했다. 이는 국내 대기업의 글로벌 경쟁사가 해외 수주를 통해 비용을 절감하고 있어 대기업도 어쩔 수 없다는 얘기다. 물론 실제로는 대기업이 해외에서 부품 조달 등을 하려 할 경우 관세도 물어야 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등 위험도가 높아지는 점을 감안해야 하는 만큼 대기업 의 주장이 모두 맞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기업이 글로벌 업체로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납품 소기업들도 전 세계적 경쟁에 노출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와 함께 최근 공급망 관리 강화로 대기업이 재고를 떠 안으려 하지 않고 있어, 재고 부담 등도 모두 납품기업으로 전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따라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으로서는 스스로 생산성 혁신을 꾀하거나 비정규직 고용을 확대, 비용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다. 문제는 우리 중소기업들의 현실이 생산성 혁신을 꾀하기 힘들다는 데에 있다. 1차 도급 업체들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어 투자 여력이 있지만, 2차 이하 도급 업체들은 부가가치가 현저하게 낮아 생산성 증진에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다.
특히 금융권도 중소기업들이 생산성 혁신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겪는 과정에서 금융기관들은 건전성을 강화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 몰렸고, 이후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높은 중소기업 대출은 크게 위축됐다. 이 때문에 중소기업들은 투자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기 보다는 비정규직과 외국인 노동자 고용을 늘리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수준으로 전락하게 됐다. 김선빈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상생의 생태계 경제를 위해선 중소기업들의 경쟁력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서로 충돌하는 제도들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며 “특히 금융의 중소기업 지원을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일근기자
■ 甲이 아닌 乙입장서 '상생의 손' 내밀어야
납품대금 현실화, 현금결제 확대, 접대 근절, 협력업체 인력교육, 기술개발 자금지원…
중소기업들의 한결 같은 소망이자,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었던 대책들이다. 역대 어느 정부도 중소기업 지원을 외치지 않은 적은 없었고, 대기업들 역시 상생협력을 다짐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정부와 대기업들의 약속대로라면 지금쯤 한국경제는 이미 ‘중소기업 파라다이스’가 되어 있어야 하고, 양극화 구조 또한 해체되었어야 옳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 중소기업은 더 어려워지고, 그에 비례해 양극화의 골은 깊어만 지고 있다. 중소기업과 대기업 관계에서 납품대금에 ‘제 값’이란 없다. ‘후려친 가격’이 곧 적정가다. 그나마 현금으로 받을 수만 있다면 감지덕지. 술값에, 골프비에, 여행비까지 각종 접대비는 그냥 ‘유지비용’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어려운 여건에 공들여 키운 인재, 공들여 개발한 기술도 툭하면 대기업 차지가 된다. 억울하고 분해도, 하청관계가 끊어질까 두려워 하소연할 곳 조차 없다.
정부의 대책, 대기업의 다짐이 무용지물이 되는 현실에 대해 한 중소기업인은 “갑(甲)은 절대로 을(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대책을 내놓고 대기업은 상생방안을 제시하지만, 그조차 ‘갑’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현장에선 겉돌 수 밖에 없다는 것. 이 기업인은 “평생 갑으로만 살아온 공무원과 대기업 사람들이 어떻게 을의 처지를 알 수 있겠나. 단 하루만이라도 을이 되어본다면 상생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생은 양극화의 해법이 될 수 없다고 지적도 있다. 구조적 문제는 시장원리 혹은 법과 규제로 대응해야지, 상생과 같은 공허한 개념으론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생이 만병통치약일 수는 없어도, 양극화의 단단한 고리를 푸는 중요한 열쇠임엔 틀림없다. ‘보이지 않는 손(시장원리)’과 ‘보이는 손(정부개입ㆍ규제)’의 한계를 메우려면, ‘상생의 손’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둔다면 양극화는 악화될 수 밖에 없다. 부는 편중되고,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은 중소기업과 서민들의 설 땅을 없어지게 만든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의 부작용을 막기 위한 ‘보이는 손’의 과도한 개입 역시 또 다른 폐해를 낳는다. 지나친 중소기업 보호는 대기업의 의욕을 떨어뜨려 경제의 ‘파이’증식을 막고, 도를 넘는 서민정책들은 도덕적 해이와 정부재정 악화로 이어진다.
바로 이 점에서 상생은 ‘제3의 길’이 될 수 있다. 대기업들이 중소기업을 진정 동반자로 인식하고 제대로 보상만 해준다면, 부자들이 사회적 책임과 나눔을 통해 서민들을 보듬는다면, 경제의 효율 저하나 재정악화 없이도 양극화의 갭은 어느 정도 좁힐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를 통해 ‘존경받는 대기업’ ‘축복받는 부자’의 인식이 확산될 경우, 사회 통합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한국일보는 ‘양극화, 대한민국이 갈라진다’ 시리즈를 마무리하며, 경제적 상생실현을 위한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성철 경제부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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