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나선 로널드 레이건은 재선을 노리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경제실정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카터는 레이건이 그 해 1월 시작된 경기후퇴(recession)를 불황(depression)으로 부풀려 여론을 오도한다고 맞받아쳤다. 이때 레이건 특유의 언어적 유머가 빛을 발했다. “카터가 원하는 게 단어의 정의라면 내가 하나를 추가해 주겠다. 경기후퇴는 이웃이 직장을 잃을 때, 불황은 내가 직장을 잃을 때, 그리고 경기회복(recovery)은 카터가 자신의 직장을 잃을 때다.”
# 이명박 대통령이 현장과의 소통을 정책의 기본으로 여기고 틈만 나면 장ㆍ차관들에게 현장 확인을 독려해온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런데 최근 한 지인은 정부 고위인사가 대통령의 말을 냉소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고 말했다. “글쎄, 그 사람이 그러는 거예요.‘위에서 현장, 현장하니 가기는 가지만 솔직히 가서 새삼 뭘 얻고 느끼겠습니까. 되레 골치 아픈 민원에 시달리기 일쑤지….’라고. 한심하다 못해 대통령이 딱하게 여겨지더군요.”
앞의 얘기는 워낙 유명한 일화이니 누구나 들어봤을 것이고 후자는 지금부터 따져볼 문제다. 별 관계가 없을 것 같은 두 얘기이지만 이를 잇는 고리는 있다. 전자의 메시지는 큰 경제가 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된다 해도 나와 내 주변의 삶이 나아지지 못하면 빛 좋은 개살구여서 결국 정권에 화살을 겨누게 된다는 뜻이다. 후자는 책상에 앉아 거시지표만 붙들고 있으면 위기 이후의 새 패러다임, 즉 저성장ㆍ고실업ㆍ다극화ㆍ규제로 표현되는 ‘뉴 노멀(새 기준ㆍnew normal)’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엉뚱한 처방을 편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지금 상황을 보면 정부는 급속한 경기회복세를 기뻐하기보다 특정 계층에만 집중되는 성장의 과실과 온기를 걱정할 때다. 삼성전자 현대차 등 한국의 대표기업이 매번 사상 최대 실적을 자랑하고 수출은 기록적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으나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남의 일일 뿐이다. 최근엔 가장 큰 숙제였던 고용시장에도 훈풍이 불고 있으나 15~29세의 청년실업은 악화일로다. 아래 몫을 떼어 위에 얹어주는 식으로 전체 경제규모는 정상을 되찾았지만, 사람들은 굳이 지니계수 등에 기대지 않더라도 우리사회의 불균형이 한층 깊어졌다는 것을 생래적으로 안다.
한나라당이 엊그제 내놓은 지방선거 백서에서 성장 소외계층의 불만과 반발, 20~30대의 표심을 읽지 못한 것이 패배요인이라고 고백한 것은 문제를 제대로 본 것이다. 이 점에서 임태희 대통령실장이 일성으로“밥을 혼자 먹으면 그 평화는 지속되기 어렵다”며 “공정성을 어떻게 지켜줄 것인지 고민하겠다”고 말한 것은 적확했다.
백용호 정책실장 역시 공정거래위원장 국세청장 등 경제검찰을 지낸 경력을 앞세우며 공정경쟁과 조율을 강조한 것이 눈에 띈다. 신임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도“더 낮은 곳으로 들어가 서민의 고통을 느끼고 같이 숨쉬면서 상생의 사회를 만들겠다”고 가세했다.
집권 후반기 국정지표에 친서민과 상생 색채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이 대통령의 뜻에 따라 당정 핵심 인사들이 앞다퉈 낮은 곳과 공정성을 강조한 것은 반갑지만 이런 약속이 현장에서 정책성과로 나타날지는 미지수다. 대기업은 위기과정에서 하도급업체를 후려쳐 이익을 극대화하는 관행에 더욱 익숙해졌고, 정부는 단기 실적주의에 빠져 주요 사업에서 대기업을 우선시하는 버릇을 거의 고치지 못했으니 말이다.
“정부가 얼마 전 스마트 헬스케어 시범사업을 벌인다며 지원 대상자로 두 대기업 컨소시엄을 선정한 것은 왜곡된 구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코미디다. 왜 5조원이 넘는 분기이익을 낸 회사가 정부 지원으로 자사제품 시범사업을 하나”는 한 벤처기업인의 호소는 결코 소홀히 들을 수 없다.
이 대통령은 어제 첫 3기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하며 골고루 잘 사는 정책을 만들자고 했다. 그 두 축은 공정성과 현장성이다. 훌륭한 기수를 고르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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